[투데이안 객원논설위원]최근 우리사회에는 ‘루저’(Loser) 논란이 광풍처럼 거세게 불어 닥치고 있다.

이 논란의 진원지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모 방송국의 한 연예프로그램에서 여대생 출연자가 "외모가 중요한 요즘 같은 시기에 키는 경쟁력이다.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생각한다"라는 발언에 기인하고 있다. 이 발언을 한 주인공의 진의가 무엇인지 논외로 한다 해도 ‘루저’(Loser)는 실패자나 패배자를 의미하기 때문에 키 작은 남자는 곧 실패자나 패배자로 등식화되었다는 것이 루저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우리사회에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정형화된 이분법적 사고의 틀이 숨겨져 있다.

즉 우리사회에 루저(Loser)가 있다면 그 반대쪽에는 성공한 자나 승리한 자의 의미를 갖는 윈너(Winner)가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물론 본 논란의 중심에는 루저와 윈너를 나누는 남자의 키, 즉 신장이 구분의 척도로 거론되고 있지만, 여기에는 공정한 게임이나 기회조차 가질 수 없는 루저들의 사회를 향한 독기어린 분노가 표출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결정되는 이른바 ‘귀속적 지위’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획득적 지위’보다 우세한 사회에서 실패자나 패배자의 ‘상대적 박탈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예컨대 태어나면서부터 교육적,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성장하면서 신체적 우위를 점하는 사람은 바로 위너(Winner)가 되고, 그러한 기회를 누리지 못하거나 박탈당하는 사람들이 바로 루저(Loser)로 전락하는 사회라면, 과연 이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가?

나아가 신장제한 때문에 직업선택의 기회를 포기할 수밖에 없고 심지어 이성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잡을 수 없는 이른바 ‘주변인’(marginal person)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면, 과연 이 사회가 최소한의 기회적 평등을 보장하는 사회인지 반문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장애인들의 분노와 한숨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루저’(Loser) 논란의 지원지인 방송사 게시판에는 이 논란과 관련 장애인을 대변하는 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다.

장애특성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장애인 중에는 다양한 원인으로 인한 저신장장애인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루저발언은 물론 직접적으로 장애인을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키가 작은 장애인들이 수치심을 자극하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장애인을 옹호하는 네티즌들의 지지적 반응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별하여 바라보는 이분법적 시각에 대한 공격적 대응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색안경을 벗어 던지지 않는 한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때로는 공격적으로 때로는 은밀히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최근의 ‘루저’(Loser) 논란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우리사회가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넘어 사회구성원 모두가 공정한 기회를 누릴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갖게 된다.

우리 모두가 기회의 평등을 누린다는 것은 차이를 인정하는 사회적 인식의 확대로부터 출발하며 이는 편향된 절름발이식 사고를 우리사회에서 걷어내는 고된 작업의 결과로부터 얻어진다.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게임이 만연한 곳에서 그리고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 강요와 강압이 정당화되는 곳에서 마녀사냥식 심판과 단죄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미약하고 작지만 다름을 인정하고 실천하는 우리 하나 하나의 성찰적 자기반성이 궁극적으로 사회구조를 바꾸는 출발점이 되고 절름발이 사회는 이제 모두가 승리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최낙관 예원예술대 사회복지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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