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번째 이야기> 치열했던 삶의 현장, 용머리고개

“이 결혼은 절대 안 된다.”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씀하시며 문을 나서 대명까치맨션 뒷동산으로 올라가셨다. 아버지를 찾아 동산에 오르니 언덕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아버지, 허락만 해주시면 열심히 잘살겠습니다. 저를 믿고 허락해 주세요.” 당시만 해도 지역감정의 골이 깊었던 때라 경상도 여자와의 결혼 허락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아버님, 이제 세상이 달라졌잖아요. 서로 사랑하니까 둘이 열심히 살게요. 나중에 허락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하실 거예요.” 한참을 생각에 잠기시던 아버지는 결국 허락을 해주셨고, 나중에는 어머니가 살짝 부러워할 정도로 며느리를 예뻐하셨다.

완산칠봉 끝자락에는 대명까치맨션이 자리 잡고 있다. 30여 년을 전전하던 월세와 무허가 주택의 시대를 마무리하고, 처음으로 집다운 집으로 이사를 한 곳이다. 누나가 교원임용이 되고 대출을 받아 부모님을 아파트로 이사해 드렸다. 우리 집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대사건이었다. 태어나 처음 엘리베이터를 타보기도 하고, 문만 닫으면 외부와 차단되어 가정의 편안함과 안락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난방이 잘되어 그 자체만으로도 천국에 사는 것 같았다. 가족 모두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기뻐하며 한동안 무척 행복했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하고 전주로 내려와 부모님이 사시는 대명까치맨션 근처 주택 2층에 잠시 살았었다. 오래되고 밀집된 주택이라 춥고 덥고 불편해서 많이 힘들었다. 그 후 효자주공 3단지에 있던 공무원 임대아파트에 입주하여 평화동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할 때까지 한동안 거주하였다. 첫째는 아직 세 살이 안되었고, 둘째는 전주에 와서 태어났으니 두 아이 모두 유년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당시에는 공무원들의 생활이 어려워 정부에서 구입한 주공 아파트를 임대해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경쟁이 치열하여 순번을 정해 입주를 해야 했다. 아파트는 오래되었고 평수도 무척 작아서 생활하기가 무척 불편했다. 그래도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기까지 꽤 오랫동안 신세를 졌으니 추억도 많다. 어린 시절을 판잣집에서 보냈던 나로서는 아파트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지냈었다.

효자주공 3단지는 오래전에 건축된 아파트라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건물이었으며, 부지는 넓고 단지가 많았다. 그곳에 거주할 때부터 재건축에 대한 말이 나오면서 재건축이 되면 최고의 입지가 될 거라는 소문에 꽤 인기 있는 아파트였다. 그러나 단지가 넓고 입주민이 많다 보니 협의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서인지 아직도 재건축은 진행 중이다. 언젠가 재건축이 이루어지고 분양이 되어 전주의 랜드마크 아파트가 되면 좋겠다. 완산칠봉 자락 아래 대단지 아파트가 조성되어 사람들도 북적이고 상권도 되살아나서 용의 기운이 넘치는 구도심이 되기를 바라본다.

아파트 근처에는 서부시장이 있다. 지금은 많이 축소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꽤 규모가 있는 재래시장이어서 장보기가 편리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자주 가지는 못했어도 가끔 들르는 시장은 구매 욕구를 채우기에 충분했다. 어릴 적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재래시장에 가면 맛있는 난장 음식도 먹고 예쁜 옷과 신발도 사주셔서 시장에 대한 기억이 좋다. 그래서인지 아내와의 재래시장 구경은 즐겨하는 일상 중의 하나이다. 주말이면 딱히 살 물건이 없어도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 이곳저곳을 거닐다 보면 보는 재미, 먹는 재미, 사는 재미에 빠져 즐겁고 힐링이 되곤 한다. 어머니도 시간만 나면 시장을 거닐며 자식들에게 요리해 줄 재료를 사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하고 계시니 재래시장은 물건을 구매하는 장소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행복저장소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는 듯하다.

아이들의 유년시절을 보낸 용머리고개는 아내에게 힘든 기억이 많은 공간이다.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객지에 내려와서 어린 두 아이의 육아를 혼자 감당해야 하는 일은 하루하루가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고 했다. 큰애는 손을 잡고 둘째는 등에 업고 남은 한 손에는 아이들 짐과 핸드백을 들고 꽁꽁 언 용머리고개 육교를 건너던 이야기를 할 때면 그때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나 눈물이 촉촉이 맺히곤 한다. 타지로 전보를 자주 다니는 철없던 남편은 그런 사정도 모르고 주말에 내려오면 부모님 댁에 달려가 가족들과 놀기 바빴으니 지금 생각해도 미안한 마음이다. 집이 너무 좁아 아이들이 마음대로 뛰지 못하게 했던 이야기, 내 집 마련을 위해 매일 같이 김치 하나에 간장 밥을 비벼 먹였던 이야기, 이 집 저 집 옷가지와 장난감을 얻어왔던 이야기를 할 때면, 책을 써도 몇 권은 될 거라는 아내의 말이 지금도 가슴을 메이게 한다.

용머리고개는 아버지가 10년 넘게 넘어 다녔던 곳이다. 팔복동에 있는 공장에서 구룡리 집까지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면서 용머리고개를 지나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인적이 드물어 고개를 넘어올 때 깡패들을 만나 월급도 여러 번 빼앗겼다고 한다. 아버지는 용머리고개를 넘어 다니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전쟁의 폐허에서 경제를 일으켜 세운 산업화시대를 살았던 부모님 세대는 힘든 세월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녀에게 가난의 끈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허리띠를 매고 먹을 것 입을 것을 참으며 하루하루 버텨야 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헌신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하였다. 아버지와 나의 치열했던 삶이 담겨 있는 용머리고개를 아이들은 어떻게 기억할지 궁금하다.

저작권자 © 투데이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