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가 부족한 시대, 누군가는 시작해야 했다"

 

[투데이안] 1980년대, 전주에는 고등학교가 부족해 수천 명의 학생들이 매년 타지로 떠났다.

누군가는 먼저 나서야 했다. 누구보다 무거운 삶을 살아온 양복규 이사장은, 조용히 그리고 단단하게 길을 닦았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교육과 복지'라는 두 단어를 곱씹고 있다.

투데이안은 창사 15주년 기획시리즈로 사회복지법인 동암재단을 6회에 걸쳐 연재한다.

그 첫번째로 동암재단 양복규 이사장을 만나 재단 설립목적, 삶의 철학 등에 대해 들어본다,/편집자 주

①동암재단 양복규 이사장 인터뷰 ②전북특별자치도장애인복지관 ③동암재활원 ④동암차돌학교 ⑤동암자활자립장 ⑥전북특별자치도장애인작업장 순

"조금이라도 복지에 도움이 될까 싶어 학교법인과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했습니다."

동암재단 양복규 이사장은 담담한 어조로 재단 설립의 배경을 풀어놓았다.

1980년대 초, 전주에는 고등학교가 턱없이 부족했다. 매년 2천여 명의 학생이 타지로 역유학을 떠나야 했던 시절이다.

"그때 학교가 꼭 필요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1980년에 동암재단을 세우고, 81학년도부터 학생 모집을 시작했습니다."

기자가 방금 다녀온 동암고등학교는 천잠산 자락에 포근히 안긴, 정남향의 명당이다.

양 이사장은 웃으며 "동암고는 좌좌오행의 터입니다. 물이 전부 밖으로 빠져나가고, 한 번도 재해를 입은 적이 없습니다. 1만3천5백 평 부지 안에 물 한 방울 고이지 않는 곳이죠"라고 설명했다.

양복규 이사장의 삶은 단순한 '사업가'의 궤적과는 다르다.

"저는 전북 순창 동계에서 태어났습니다. 다섯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고, 영구 장애를 갖게 됐습니다. 치료법도 없던 시절이었죠."

그로 인해 그는 일찍이 깨달았다. 교육과 복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2세 교육을 위해 사학을 세우고, 사회복지를 위해 힘쓰는 것,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 믿었습니다."

장애와 비장애를 가르는 사회의 벽에 대한 질문에도 그는 솔직했다.

"지금은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아직 마음 속 편견은 남아 있어요. 시내 식당조차 턱이 높아 쉽게 출입하지 못하는 곳이 많습니다. 이 벽이 완전히 없어지려면 한 세대는 지나야 할 겁니다."

동암고 출신으로 현직 헌법재판관인 김형두 재판관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다.

"김형두 소장은 참 인성이 좋습니다. 인사법, 예법 하나하나 극진해요. 통화할 때마다 '항상 조심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이셨던 것도 그 품성과 집념에 영향을 줬겠지요."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바람을 묻자 양 이사장은 현실적인 아쉬움을 드러냈다.

"전북도나 전주시가 지금도 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립학교 감사를 공립보다 하루 더하는 것은 불합리했어요. 교육감께 말씀드려 바로잡았습니다. 앞으로도 사소한 편견 없이 공정하게 대해주길 바랍니다."

현재 동암 가족은 400여 명. 그에게 직원들에게 전할 말을 부탁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나뉘어 있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결국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통해 스스로 정규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주기를 바랍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양복규 이사장은 굳은 신념과 따뜻한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가 지나온 길처럼, 동암재단의 미래 또한 곧고 단단하게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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