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착오적 관념을 적용해 온당한 시대의식의 정립을 촉구하는 스릴러

조현철 군산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직과 교수(시네몽 회원)
조현철 군산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직과 교수(시네몽 회원)

[투데이안] 젊은 여성 무속인이 미국행 비행기의 기내에서 일본인 스튜디어스에게 일어로 말한다.

“그런데 전 한국인이에요.” 남자 조수와 함께 도착한 엘 에이 부촌 지역의 한 저택에서 그녀는 한국인 중년 남성의 애절한 요청을 접한다.

아버지가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거동을 못 하시고, 형도 미쳐 날뛰다가 사망했으며, 자신도 온통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시달리고 있노라고.

게다가 두 번의 유산 끝에 얼마 전에 얻게 된 아들은 정체 모를 병으로 시달리며, 시시각각으로 불편한 증세를 겪으며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단다.

머나 먼 이국 땅에서 원래부터 부유한 탓에 돈 밖에 없는 이 집안의 연이은 불행은, 직계의 남성 라인을 타고 강렬하게 진행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처음 본 아이의 병실에서 불길한 기운을 포착한 그녀는 히스테릭하게 그러나 진지하게 선언한다. “묘바람이 불었군! 험한 것이 들었어, 조상님들 중 누군가가 지랄을 떨고 있는 거에요.”

문제 해결은? 당연히 ‘파묘’이다. 단단히 화가 나 있는 그 조상님을 다시 잘 모시기 위해, 필수적으로 먼저 해야 할 일이 그 분의 불만스런 상태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란다.

파묘와 화장을 반대하는 고모의 의견에 대항해, 자신이 유일한 ‘적자’로서 의사결정권자임을 내세우며, 아들은 조부의 묘를 파내는 데 동의해준다.

귀신님의 심기를 다루는 문제인지라 묘자리를 극진한 예의로서 조심스레 다루어야 했고, 또한 정성스런 제례로 그 혼을 불러내어 위로 혹은 설득해야 했다, 이에 이렇게 예민한 ‘무당’과 예리한 ‘지관’의 조합이 결성됐다.

그렇게 어둠과 밝음, 악과 선 사이에서 때때로 밝은 세계를 질투하는 악의 침투 시도에 대항해내는 무당과, 흙을 통해 이어지는 영원한 자연의 싸이클 속에서 산자와 죽은자를 땅을 매개로 연결해내는 지관이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파야 하는 묘자리는 범상치 않은 풍수적 위치에 있었나 보다.

산 꼭대기에 그저 평범한 외양으로 숨어 있듯 자리 잡은 산소를 처음 본 후, 베테랑 지관은 손을 내저어 버린다.

그는 악지 중 악지이며 이름도 없는 묘비에 괴이한 수치들이 정교하고 수상하게 박혀있는 모습이, 보통 불길한 예감을 일으키는 정도가 아니라며 철수를 주장한다.

어두운 낮빛으로 자칫 파국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는 지관에게, 약삭빠른 무당은 챙기게 될 두둑한 수고비를 상기시키며, 동시에 이런 말로 지관의 직업윤리적 사명을 일깨운다, “미국에 있는 어린 생명은 살려야 할 것 아니에요!”

또한 파묘 과정의 정성스러움과 극진함에도 모자람이 있었나 보다.

망자의 한을 달래고 액운을 빼내기 위한 대살굿이, 묘 앞에 껍질을 벗긴 동물의 사체를 걸어두고, 그야말로 혼을 빼어놓는 무당의 칼바람 춤사위와 함께 벌어진다.

강렬했던 굿판이 그 신명을 다 하고, 화장을 위해 관을 들어올린 후, 뱀 한 마리가 남겨진 흙구덩이 밑을 꿈틀거렸고, 인부는 삽질로 이를 절단하고 만다.

이에 푸르던 하늘에 먹구름이 쌓이고, 운구 행렬을 맞는 것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짙은 물줄기였다.

개봉되지 않은 온전한 관 상태로 화장을 원했던 상주의 기대는, 우천 시 화장을 금하는 관례로 실현되지 못하고, 이제 이 관은 근처 병원 영안실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구청 신고 없이 추진되는 절차를 돕던 영안실 직원은, 탐욕어린 호기심으로 기어이 관 뚜껑에 손을 대게 되고, 이는 원한 가득한 혼령 저장소의 밀봉을 푸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고삐가 풀린 귀신은 이제 증강된 그 어둠 에너지의 동선을 자유롭게 확장하게 된다. 그리해 미국에 거주 중인 아들과, 한국 호텔에 머물고 있는 손자, 그리고 다시 미국 병원에 입원 중인 증손자는, 이 ‘욕구불만 과충전’의 조상 귀신을 두렵게 대면해야만 한다.

한편, 지신을 험하게 대한 죄로 신체와 정신에 ‘동티의 재앙’을 겪고 있는 인부를 병 문안한 후 지관은, 심란한 마음으로 이 흉한 기운의 묘자리를 찾아가 다시 파내게 된다.

어둠과 함께 승량이들이 몰려드는 것도 괘념치 않아 하며 집중하던 ‘재 파묘’ 중, 여자의 얼굴을 한 절단된 뱀의 몸체를 찾아 예를 갖추고 흙 표면을 더듬어보는 그의 손길에 둔탁하게 잡히는 것이 있었다.

이렇게 다시 걷어낸 흙 위로 포착되는 것은, 원 관보다 더 크고 세로로 우뚝 서 있던 또다른 ‘관’이었다. 자 이제 이 관의 주인은 또 어떤 한 혹은 욕망을 품고 이승에 그 음험한 기운을 뻗쳐댈 것인가?

『파묘』는 사실 단순한 오컬트 무비가 아니다. 하나의 이야기로서 영화가 가지는 확장성은 예사롭지 않다.

망자의 ‘묘자리 사정’과 현존 자손의 길흉 간 치명적 관련성에 주의하고자 하는 우리 사회의 관습적 오류를, “파묘‘는 정교한 게임의 규칙으로 활용해가며, 기꺼이 동참하고자 하는 관객에게 ’미스테리 추적‘의 유희를 권유한다.

그리해 한 집안의 구성원들이 겪어내는 통제 불능 불행의 여러 양상과 어둡고 신비스런 혼령 간 접합점을 찾아내는 과정이, 신경증적 긴장과 탐구적 호기심을 끌어올린다. 그런데 이는 단순한 퍼즐 게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 과정에서 현세적 삶의 복잡한 양태의 너머로 또 다른 시간대에 속하는 별개 차원의 존재들이 일으키는 음험한 작용들에 대한 주의의 환기가 이루어지고, 이는 관객의 인식을 그동안 익숙해왔던 시간적 공간적 논리적 계열에만 가두어놓지 않는 결과를 일으킨다.

중후반 까지 『파묘』가 굴리던 ’인식 확장‘의 장치는,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추적과 아슬아슬한 스릴의 묘미를 전하며 순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첩장’의 문제가 덧붙여진다.

원 주인의 관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뻣뻣함을 다해 씩씩거리는 자세로 위를 향하고 있는 관말이다.

그리고 이 관을 꼭꼭 묶어두고 있는 것은 칭칭 감은 쇠사슬이었다. 이 물리적 차원의 첩장에, 국가적 역사적 차원의 ‘첩장질’이 덧붙여지면서, 영화는 담대한 의미적 확장성을 가지게 된다.

바로 식민지 수탈 시대에 그 앞잡이 역할로 엄청난 규모의 보상을 생전에 누렸던 자의 혼령을 막고 있던 실체가 그것이었다.

그리해 첩장으로 인해 꼭 막힌 상태에서 춥고 배고파하던 친일 귀신의 준동을, 자손들이 불행과 함께 대면해야 했던 것이다. 이제 무당과 지관은 이 끔찍한 ‘산자와 죽은자 간 대면’을 막거나 중재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파묘』의 확장성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제는 첩장된 관 주인과의 대면이 중심 문제가 되고, ‘억울한 혼령의 한을 풀어드리자’며 지관은 보다 더 강력한 귀신과의 대면을 주도한다.

이렇게 그는 새로운 미스테리 추적의 과정을 무당 및 동료들과 함께 위험천만하게 겪어내어야 했다.

그리해 지관은 빙의된 귀신의 목소리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의 의미를 찾게 되며, 바로 풍수지리적으로 범(한반도)의 급소에 해당하는 위치에 이 뻔뻔스런 ‘말뚝 관’이 박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실 『파묘』는 시대착오적 관념놀이에 기반한 ‘순간긴장 형’ 공포물로 남을 수 있었다.

일단 귀신을 인정하고, 초자연적 존재가 일으킬 수 있는 온갖 난동질을 주인공들이 겪는 과정을 요령있게 중계해내는, 재주를 뽐낼 수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속설로 내려오던 무속의 세부 규칙들을 활용하며, 희생자 구하기의 클리프행잉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파묘』는 공포영화의 장르적 기교를 활용해 써스펜스를 조장하는 기법에서도 밀리지 않는다.

그러나 『파묘』의 야심은 보다 진지하고 크다. 묘자리를 둘러싼 샤머니즘과 풍수지리 등에 관련된 구시대적 의식과 절차는, 그 전개 상 긴장 조장의 원천으로 작용하지만, 동시에 전통적 장례문화와 무속신앙의 주요 측면들이 아직도 우리네 생활에 머물러 있음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는 급변하는 사회환경의 맥락 안에서 앞을 향한 행진에 바쁜 와중에, 정겨웠던 이전을 돌아보게 하면서 묘한 향수의 느낌을 불러내는 작용을 한다.

또한 무엇보다 영화는, 식민통치의 역사를 돌아보게 하며, 정의와 발전의 이름으로 ‘민족정신’이 여전히 우리 시대의 화두가 돼야 함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주인공들의 극 중 이름이 민족 독립을 위한 투사들을 기리고, 차량 번호들이 광복일과 심일운동일을 가리키게 하는 등, 영화는 곳곳에서 역사적 민족의식을 소환하는데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풍수설과 무속신앙 그리고 음양오행설 등 구시대의 관념과 규칙들은 논리적 실체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

대체로 허술한 유사 추리의 논리적 연결성으로 버티면서, 이것들은 인간사와 사물의 작용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방해를 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두 시간 여의 어두운 폐쇄회로 속에서 밝게 비치는 스크린은, 그 구성 요소들 서로 간에 유추의 연결을 이루는데 있어 최적화된 환경을 제공한다.

수많은 영화들이 판타지의 옷을 입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관객은 그저 새롭게 설정되는 공식들이 어떻게 적용돼, 지금의 관람 이외의 시간에는 허용되지 않던 경험들이 얼마나 다채롭게 등장하게 될 것인지 궁금해하며, 그 결과를 즐긴다.

그런데 때로는 이 창의적 탐색 활동이 현실 문제에 대한 온당한 유추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파묘』의 게으른 논리성에 기반한 화려한 출렁임의 환타지는 해방 후 근 1세기를 맞는 우리에게, 시간의 강을 건너 근원과 정체성에 대한 적극적 인식을 국민적 차원에서 재정비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것도 확장적 추리 게임의 회로를 즐기면서 말이다.

저작권자 © 투데이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