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안중근장군 기념관 원장/ 매천사상연구소장 김영붕

전주 안중근장군 기념관 원장/ 매천사상연구소장 김영붕
전주 안중근장군 기념관 원장/ 매천사상연구소장 김영붕

[투데이안] 조선조 말기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의 뒷부분은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 활동들의 기록으로 점철돼 있다.

매천은 의병의 격문뿐만 아니라 조선조 제일의 애국 시인답게 의병 활동을 찬양한 시들을 많이 썼다.

그러므로 매천의 사상은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滕博文, 1841∼1909)를 척살하고 15개의 죄를 물은 의병장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사상과 일통하고 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잡혀 여순 감옥에 있는 동안 일본 검찰관 미조부치에게 거사 이유를 밝혔다.

‘일제日帝가 국모國母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대한제국의 광무황제 고종을 폐위시키고, 을사늑약과 정미칠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철도와 광산을 빼앗은 죄, 일본 제일은행권 지폐를 사용하게 한 죄, 군대를 해산한 죄,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 등을 제시했다.

안중근 장군이 사살한 이토 히로부미는 어떤 인물인가? 일찍이 런던대학 화공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던 사람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에 참여한 이래 4번이나 일본 총리대신을 지냈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과 8명의 대신을 을러메어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했고, 그 결과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17일에 외교권을 빼았겼다.

고종은 끝까지 이 늑약을 인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 해 곧장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했다.

1907년 6월에 고종은 「을사조약」이 국제법상 무효임을 주장하기 위해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것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권정례權停禮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 황제를 즉위시켰다. 대한제국의 주권 탈취에 갖은 횡포를 자행한, 일제를 대표하는 조선 침략의 제일 원흉이었다.

이즈음 안중근 연해주를 중심으로 이범윤 등과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1908년 7월 7일 함경도 경흥에서 일본군 초소를 급습해 일군 5명을 사살하고 5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토의 포악한 정략을 성토하기 위해서 잡은 포로를 만국공법에 의해 풀어주었다. 그러나 독립군의 정보가 새어 안중근 부대는 일군의 공격을 받아 참패하고 말았다.

1909년 2월 15일에 독립운동가 최재형 집에서 안중근, 우덕순 등 12명은 동의단지회 결성하고, 왼손 무명지 첫 관절을 잘라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 혈서 넉자를 썼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죽이기로 작정했다. 거사 전 안중근은 <장부가丈夫歌>를 지어 뜻을 확고히 다짐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지원을 받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청국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했다.

장군은 “코레아 후라(대한국 만세)”를 삼창하고 러시아 헌병에게 잡혀 일본 헌병에 넘겨졌다. 114년 전 10월 26일의 일이었다.

丈夫處世兮 蓄志當奇 장부가 세상에 처함에

(장부처세혜 측지당기) 뜻 쌓기를 마땅히 기이하게 해야 하네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시대가 영웅을 만들지만

(시조영웅혜 영웅조시) 영웅이 시대를 만든다네

北風其冷兮 我血則熱 북풍은 차가워도

(북풍기냉혜 아혈즉열) 내 피는 뜨겁기만 하네

慷慨一去兮 必屠鼠賊 강개한 마음으로 한번 가서

(강개일거혜 필도서적) 반드시 쥐 도적 이토를 도륙하리라

凡我同胞兮 毋忘功業 모든 우리의 동포여

(범아동포혜 무망공업) 이 공적을 잊지 말지어다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만세, 만세!

(만세만세혜 대한독립) 대한독립 만세!

안중근이 읊은 이 <장부가>에 대해 우덕순은 우리말로 노래해 화답했다.(출처 : 「안중근전」, 『소호당문집』, 김택영.)

저작권자 © 투데이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