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철 군산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직과 교수
[투데이안] 오프닝 타이틀이 속도감 있게 흐르면서 시끌벅적한 텔레비전 뉴스 소리들 사이로, 길쭉길쭉하게 수직의 사각 건물들이 육중함으로 화면을 눌러내린다.
그저 단순한 구조의 허연 콘크리트 덩어리였던 것들이, 이내 세련된 외양을 갖춘 거대 구조물들로 도시를 빼곡이 채우고 있는 모습이 되어 간다.
복잡다단한 형태를 한 직사각의 콘크리트 건물들이 질서정연한 배열로 스크린을 수려하게 장식하던 사이에, 갑작스레 불길하고도 치명적인 변화가 휩쓸 듯한 자세로 덮쳐 온다.
화면의 왼쪽 상단에서부터 검붉은 화염을 뿜어내며, 구조물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오프닝은, 명백하게 제목의 의미를 정면으로 배반하고 있었다, 바로 ‘콘크리트 디스토피아’의 장렬한 시각적 형상화를 통하여....
그런데, 진정한 ‘콘크리트 디스토피아’는 바로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거대 지진으로 온 땅이 초토화되어 있는데, 오직 한 동의 아파트는 건재한 상황.
곧이어 극심한 추위를 피해 생존한 주변 주민들이 이 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에 이 동 입주자들이 가장 먼저 결정해야 할 일은 ‘외부인’들과의 동거 문제였다.
그들은 나름대로 조직을 결성하게 되고, 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의견으로 비입주민들의 축출을 의결한다.
이제 이 아파트의 입주자격이 생존을 결정하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진입을 감행하는 사람들과 결연한 의지로 이를 막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전선이 형성되었다.
각종 가재도구를 가져와 바리케이트를 치고 무기로 활용한 입주민들은 장렬한 사움 끝에 ‘수성’에 성공하였다.
이제 대문 밖 패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목숨을 앗아갈 정도의 혹한과 굶주림이 될 것이었다.
한편 아파트 안 승자들의 삶엔 일정한 질서의 수로가 점점 더 깊게 파여지게 되었다.
어눌한 어투의 9층 사는 한 중년 남자는 돌발 상황의 위기에서 기민한 몸동작으로 주목받은 후, 입주자 대표로 추대된다.
그는 특히 ‘침입 저지 전투’에서 극단화되는 성정과 괴력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전과를 세운 후, 입주민들로부터 경외감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리더쉽을 강화하는 방식을 터득하게 되었으니, 이는 (아파트) 주민주의의 배타성을 강조하고 타자들에 대한 약탈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이에 충직해진 주민들은 지도자를 ‘거대화’하고, 그와 함께 하는 자신들은 스스로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선민의식’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화답하게 되었다.
외피를 입고 있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사실 ‘현실 공포물’에 가깝다.
생존과 욕망의 요구에 극도로 민감하게 되도록 전체적 맥락이 초기화된 상황에서,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까?
가능성이 희박한 재난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자꾸만 그동안 우리네 현실 세계에서 우리 안에 내재해 왔던 온갖 부정적 마음태세를 스스로 상기하도록 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명품 아파트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우리는 보다 쾌적하고 차별화된 도심 내 ‘넉넉한 공간’의 확보를 위해 그토록 배타적으로 집중해 왔단다.
그리고 그 공간에의 상주 자격을 기준으로 외부인을 그토록 표나게 구분해 왔단다.
또한 그 모든 차별적 자부심을 가능하게 하는 소집단주의의 기치를 높이 내거는 자들의 귄위에, 그토록 순종해 왔단다.
영화는 우리가 쫒아왔던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환상이, 바로 ‘콘크리트 디스토피아’의 현실이 전개되는 출발점임을, 아주 영리하고도 진지한 방식으로 상기시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