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봉수 시인, ▶문학평론가, ▶전북과미래연구소장, ▶후백제시민연대 공동대표
▶한봉수 시인, ▶문학평론가, ▶전북과미래연구소장, ▶후백제시민연대 공동대표

들어가며..

2022년 12월 28일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 개정으로 후백제가 비로서 ‘고대사 문화권’에 포함됐다. 전주시는 후백제 왕도복원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후백제의 왕도인 완산주(현 전주와 완주)는 천백년 고도(옛 왕성)이다.

이제 천백년 역사를 잇는 웅대한 의미의 지도를 그려낼 수 있다.

나아가 호남의 정신사적.문화사적 일맥의 그림을 그려나갈 수 있다.

전주시를 고도(古都 옛도읍)라 하는 이유는 장대한 꿈을 가진 ‘일국 (후)백제의 수도’였다라는 의미이다.

그렇다. 1122년전 통일국가의 염원을 담은 마지막 백제의 수도이었다.

후백제는 비록 48년간(889년 ~ 936년) 존속한 후 멸망했지만 ‘완산’을 도읍지로 정해 산성을 쌓고 커다란 왕궁을 지어 완산(完山)의 영광을 드러내게 한 역사로 남아 있다.

후백제 왕도이기에 조선의 창업자 태조와 태종은 전주(완산)를 조선왕조의 발상지로 삼게 됐던 것이다.

서기 900년부터 37년동안 후백제의 왕도(王都)였기 때문에 전주는 천년고도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그 기간은 길지는 않더라도 한 나라의 왕도로 오로지 전주만의 역사이다.

전주시민과 전북도민은 견훤대왕처럼 마한(馬韓 충청.전라지역 54개 부족국가)을 표방하고 백제가 신라보다 앞섰음을 긍지로 삼아야 한다.

백제를 이은 (후)백제의 도읍이었음을 자랑으로 삼아야 한다.

이를 위해 완산정신의 재발견과 완산문화권 정립이 시급하다. 이는 '전주시 관광문화 거점도시' 지정의 진정한 의미이다.

일제 강점기 1935년에 전주군은 전주부와 완주군으로 강제로 갈라 놓였다. 완산 천년의 정신사는 끊기게 됐고 완주군은 일제 수탈의 일번지가 됐다.

그 뒤로 전주와 전북은 뒷걸음쳐 왔다. 전주시와 완산군의 통합은 후백제 왕도와 조선 본향지의 복원이고 전북발전을 위한 미래방책이다.

견훤대왕은 여민정개(與民正開) 혁명가이다..

견훤은 농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새로운 시대를 백성과 더불어 열고자 ‘여민정개’ 정신을 실천한 혁명가이다.

비록 후백제 왕조가 2대에서 멈췄지만 견훤의 ‘세상을 바르게 열겠다’는 그 기개와 진취적인 정신을 잇고자 한다

전주(완산)로 천도후 견훤은, "내가 삼국 기원을 상고해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난 후 혁거세가 발흥한고로 변한 진한이 일어났다. 이때에 백제는 나라를 금마산에서 개국해 600년이 됐는데 668년 당고종이 신라 요청으로 소정방 13만 수군, 김유신의 권토로 황산에서 사비에 합공으로 멸망했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完山)에 도읍해 의자왕의 숙분(宿憤)을 설욕하지 않겠는가?" 라는 어록을 남겼다.

그래서 나라 이름도 백제라 했으며 '백성과 더불어 세상을 바르게 열어보자'는 뜻으로 연호를 정개(正開)라 해 완산의 백성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후백제가 남긴 문화와 정치·군사적(도성,산성)흔적은 전주 일원 곳곳에 남아, 견훤대왕의 정치사상과 후삼국 시대를 조명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대표적인 것이 1991년부터 발굴이 시작된 전주 동고산성과 노송동 인후동 일원의 후백제 유적, 궁성 및 도성 추정지 등이라 할 수 있다.

견훤이 탄생한 경북 문경, 최초 깃발을 든 전남의 순천. 첫 도읍한 광주, 아직도 건재하는 둔전지(합덕제)가 있는 충남 당진등 백제권 지역에 후백제의 흔적도 상당하리라 생각된다.

문제는 이들 유적지에 대한 고증과 발굴이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못하는 점과 발굴된 성과를 구체적으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발굴과 복원 등에 소요되는 예산 문제가 뒤따르는 탓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발굴 조사된 내용을 정리하고 이를 활용하는 작업은 미룰 수 없는 일이다.

논산에 가면 견훤왕릉이 있다. 논산시장 명의의 안내문이 마음에 든다. 논산시민의 자긍심이 엿보인다.

“후삼국중 가장 강성했던 후백제를 창건한후 중국의 오,월나라와 대등한 국교를 맺고 후삼국 통일을 염원했던 우리 지역 유일의 왕릉인 견훤릉입니다.“

문경의 가은읍은 견훤의 생가와 자라던 곳들과 아비인 아자개의 유적까지 스토리텔링하며 견훤의 영광을 드러내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후백제 역사와 관광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후백제는 백제의 후왕국이다. 한류의 뿌리가 된 백제 완산(전주)권 고유문화와 정신사를 승계했다.

후백제 역사 복원과 개발로 전북도와 전주시는 ‘천년고도 전주의 위상 정립’과 ‘관광 활성화’라는 두 가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제안한다..

첫째. 홍보)

관광객을 대상으로 현재까지 발굴 조사된 유적과 관광루트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홍보 책자를 발간하고, 후백제 전문 문화해설자를 양성하길 바란다.

후백제 전시.홍보관을 크게 설립.운영하며, 후백제 대형 홍보판을 전주 외곽 및 후백제 유적지 인근에 설치하길 바란다.

둘째. 정치권과의 협조)

후백제가 고대사 특별지원법에 추가 됐다.

이제 시작이다. 관련 문화재 발굴 및 조사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정치권과 뛰어야 한다. 전주시장의 후백제 왕경복원에 대한 의지와 공약 실천이 날개를 달았다,

셋째. 시급한 발굴)

왕도로서의 면모를 갖출 궁성, 성곽, 왕릉 추정지에 시.도예산을 들여서라도 지표조사등 발굴조사를 시급히 추진할 것을 건의한다.

후백제 궁성 유력지인 인봉리 일대 재건축 시행으로 포크레인으로 현 가옥들이 헐린 상태이다.

토목작업에 공무원과 시민감시단 투입 지표조사등 실행하길 바란다. 역사가 영원히 사라지고 있다.

넷째. 후백제 제전위원회 발족과 축제 거행)

남원 실상사 편운화상탑이 보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범도민적 ‘정개 축제’를 제안한다.

또한 매년 견훤대왕의 전주 정도를 기념해 완산주 입성 재현 행사와 후백제 견훤의 정신 ‘여민정개’ 창작 무용, 연극공연 및 문학행사등을 개최하길 바란다.

다섯째. 완산의 회복)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완산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 관.민이 힘을 합쳐 온전한 완산(전주와 완주의 통합)을 회복하고, 함께 새로운 민족문화.관광의 시대를 이 곳 천년고도에서 열 수 있기를 기대한다.

후백제의 견훤이 한국사에 다이네믹한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 그 혁명 정신이 재정립 돼지길 바란다.

그 정신이 완산주에서 조선 창업으로 맥을 이었다. 이러한 거대한 스토리로 새로운 정신.문화.관광의 시대를 열 수 있기를 소망한다.

 

시 '동고산성'

 

동고산성

                                                       -후백제 견훤의 꿈을 엿보다 / 한봉수


대동강가 달려 말을 먹이고
고구려 평양성 문루에 활을 걸자.
 

변산 줄포만에 큰 배를 띄워
황해바다 건너 대륙으로 가자.
 

승암산올라 북쪽산에 미륵을 본다.
 

아, 백제의 꿈이 이글거리는 하늘 아래
남쪽산 모악에 이르는 완산의 땅을 살핀다
 

이 거룩한 산에 성을 쌓고
백제의 길을 따라 말을 달리자.
 

백성의 피맺친 절규에 귀를 기울고
오로지 그들 더불어
세상을 바르게 펼쳐보리.
 

견훤대왕이여,
 

순천만 마로에서 깃발을 달려
무진주에서 선언한 그대의 언어는
미륵정토 이 완산 땅에 뿌려져
혁명의 씨앗이 됐구려.
 

오백년후*

그대의 산성에서 뻗어난 발리산을 타고
청년의 팔뚝같은 힘줄에 피가 돌아
이목과 오목을 타고 내려
아, 완전한 땅 정수리에 꽃 피우리.
 

* 승암산, 전주 시내가 훤히 보이는 주산, 동고산 혹은 중바위산이라 한다

* 승암산 정상에서 미륵산과 모악산이 보인다

* 완산,지금의 전주, 완전한 땅

* 바르게 펼쳐 보리 , 후백제 연호를 '정개' 라함.

* 견훤, 삼국사기, 제왕운기에 성이 이, 이름이 견훤이라 함.

탄압을 피해 백제의 성을 숨기며 살았을 것임.

* 오백년후 , 892년 후백제 건국부터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까지.

* 발리산, 원래 이름은 발산. 전주이씨가 발원했다해서 발리산 이라고도 부름.

* 이목, 목조 이안사와 이씨들이 살던 지명/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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