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진융마(九進戎馬)는 전북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의‘구진벌 전쟁터의 모습’을 말한다. 융마(戎馬)는 병기융(戎), 말마(馬)로‘전쟁에 쓰는 군마’혹은‘수레와 말’등을 가리킨다. 융마(戎馬)는‘군대’또는‘전쟁’을 의미하기도 한다. 현재 구진(九津) 마을은 소양면 화심리에서 가장 많은 세대가 거주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또 유명한 화심 순두부집과 온천이 자리하고 있다.

구진벌은 임진왜란 때 이정란 장군이 왜군과 일대 접전을 벌인 현장이다. 무려 아홉 번 나아가고 아홉 번 후퇴했다는‘구진구퇴(九進九退)’의 치열한 싸움 때문에 구진(九進)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임진왜란(1572) 7월 곰치재(熊峙) 싸움은 사산혈해(死山血海)라 했다. 왜군들은 격전의 혈로를 뚫고 부성의 동북쪽 안덕원(安德院)까지 풍운같이 쳐들어왔다. 그때 부성을 지키던 수비장(守備將)은 소모사(召募使) 이정란이었다. 철통같은 수비 태세에 사나웁기로 이름 떨친 적장 <고바야가와 다까가게(小早川隆景)>도 성을 깨지 못하고 후퇴하여 본진에 뭉쳐 화심방천(花心防天) 벌 안을 끼고 일대 회전을 벌였다.

그 전황은 땅은 타고 하늘은 끄슬려 구진구퇴(九進九退)의 아수라 싸움이었다. 그렇듯 하늘과 땅을 노을꽃 피듯이 피바다로 불들인 혈전을 몰고 왔대서 황운리(黃雲里)란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오늘날 곰치재 마루턱 못 미쳐 후비진 골짝에 그 당시의 충혼들을 추모하는 천인총(天人塚)과 신도비가 있다. 천인총은 왜군들이 우리 군사들의 충의에 감탄한 나머지 시신들을 거두어 묻어주고 목표(木標)를 세운 곳이다. 그 목비(木碑)에 밝혔으되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 제서(題書)하고 금산 본진(本陣)으로 퇴각했다.

임진왜란에 앞서 아득한 옛날이다. 신라 태종(김춘추)은 백제를 병탄(倂 呑)한 다음 해, 사비성을 점거 주둔했던 당나라 군사들과 도모하여 백제의 패주 병력들을 소탕에 나설 때다. 장군 품일(品日) 등의 정군로(征軍路)는 거창에서 육십령을 넘어 만덕산 곰치재로 진군하여 이곳 화심강변에 이르자 백제군과 조우, 최후의 결전을 맞았던 구진융마(九進戎馬)의 고전지(古戰址)라 했다.

그러기에 이곳 구진소의 화심산동(花心山洞)은 쓰라린 상흔으로 머졌던 요충지였다. 한편 선인야유(仙人野遊)의 작약화심으로 높이 알려진 승지(勝地)골이기도 하다. 강변에서 북동쪽 치바쳐 솟은 용문산(龍門山) 넘어 쉬지 않고 북녘 하늘을 찰랑거리는 세 봉우리를 진삼봉(鎭三峰)이라 한다.

진삼봉 안고 들어서면 노승출동(老僧出洞)의 대승동(大勝洞.신원리) 벌에 나선다. 이곳은 고려 말의 거유(巨儒) 만육(晩六) 최양(崔瀁) 공과 인조 대사간 화곡(華谷) 홍남립(洪南立) 공의 사당이 있다. 만육공은 고려의 대장군 최칠석(崔七夕)의 아들이고 포은 정몽주의 생질이다.

한편 만육공의 묘소는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에 있다. 소양면 죽절리에는 전주최씨 문성공 최아의 묘소가 있다. 화곡은 팔과정(八科亭)의 유래를 낳은 완산부성의 팔현(八賢)의 한 사람이다. 향당(鄕黨)에 서원을 세워 많은 문제(門弟)들을 거느리고 학습 도야로 여생을 보냈던 신(身), 언(言), 서(書), 판(判)이 송나라 정(程)이에 달(達)했던 인물이다.

소양면 화심리에서 진안 쪽 모래재로 조금만 가다보면 왜란 당시 치열한 전쟁을 치렀던 웅치 고개가 나온다. 전주와 진안을 넘나들던 이 고개는 임진왜란 때 조선의 관군과 의병이 전라도로 진출하려던 왜군을 맞아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던 격전지이다.

그러나 지금은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 구진벌은 물론 웅치 고개도 모두 전쟁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에 임진왜란 때의 전적지인 웅치전적지(熊峙戰蹟地)가 있을 뿐이다. 웅치전적비는 지난 1976년 전라북도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으며 1979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세워졌다.

한편 구진리 마을은 현재 한자로 구진(九津), 구진(龜津), 구진(求進) 등 세 가지로 쓰이고 있다. 구진마을은 원래 구진리(求進里)라 불렸다고 한다. 구진(求進)이라는 이름에는 유래가 있다. 구진(求進)은 구할구(求), 나아갈진(進)으로‘나오기를 구했다’라는 의미다.

이 말은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우게 될 때 이에 반대해 이 마을로 내려와 숨어살고 있던 전주최씨 만육공 최양에서 비롯됐다. 태종 이방원은 임금이 된 뒤 최양에게‘벼슬길에 나와 달라’고 간곡히 간청했다. 그러나 만육공 최양은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끝까지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벼슬길에‘나오기를 구했다’는 의미에서 구진(求進)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또한 최양의 고집을 두고 이때부터‘최고집’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따라서 구진(九津)은 구진(求進)의 잘못된 표기라는 지적이 있다. 또한 일부 마을 주민들은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이 마을에 위치한 거북형상의 바위 때문에 거북구(龜)를 써서 처음에는 구진(龜津)으로 불리던 것이 차츰 구진(九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융마(戎馬)라는 말은 조선조 시인 신광수(申光洙)가 지은 공령시(功令詩:과거 때 쓰는 시체(詩體))‘관산융마(關山戎馬)’에 나온다. 이 과시(科詩)의 글제(題)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등악양루탄관산융마(登岳陽樓嘆關山戎馬=악양루에 올라 관산의 전쟁을 탄식함)'였다. 이 시는 두보가 만년에 천하를 유랑하다가 악주(岳州)의 악양루에 올라 안녹산의 난으로 어지러워진 세상을 한탄한 오언율시이다.

관산융마(關山戎馬)는 모두 38구의 칠언(七言)으로 되어 있는데 서도 창법으로 부르도록 짜여 있다. 두보의 한시(漢詩)에다 토를 달아 부른 이 노래는 느리고 꿋꿋한 선율로 서도잡가 중에서도 기품 있는 곡으로 손꼽힌다. 그 사설(辭說)은“추강(秋江)이 적막(寂寞) 어룡랭(魚龍冷)하니 인재서풍중선루(人在西風仲宣樓)를 매화만국청모적(梅花萬國聽暮笛)이요, 도죽잔년수백구(桃竹殘年隨白鷗)를 오만낙조의함한(烏蠻落照倚檻恨)은 직북병진하일휴(直北兵塵何日休)오…”이다.

한편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의 충경사는 구진벌에서 왜군과 치열한 전쟁을 치른 이정란 장군의 사당이다. 전의이씨 후손인 그는 1529년(중종 24) 전주에서 태어났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당시 이미 64세의 노령이었다.

● <새전북신문> 수석논설위원

● <한국의 성씨> 전문기자

● <통일부 남북통일교육> 전문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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