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철 한국탄소융합기술원 공학박사
김태철 한국탄소융합기술원 공학박사

[투데이안] 미증유(未曾有)의 현재 상황을 극복해 낼 수 있는 기업가 정신이 탁월한 인물은 누구일까?

필자는 조선시대 최초의 여성CEO 김만덕을 소개한다. 만덕은 당시 어려운 조선시대 시대상황 속에 여성의 몸으로 거상이 됐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인물로 오만원 지폐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고 한다.

필자는 그녀의 위대함은 시대적 한계를 여성의 몸으로 뛰어 넘었던 극기(克己)의 기업가정신에 두고 싶다.

영조15년 김해김씨 후손으로 제주에서 태어났다. 갑작스런 부모의 죽음으로 만덕은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가게 된다.

노래와 춤 그리고 악기 연주 실력까지 탁월했던 그녀는 20세에 기녀로 활동하게 된다.

그녀의 미모 또한 육지까지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비단옷으로 치장하는 기녀로써 풍류객 양반네들에게 인정받는 그녀였다.

나름 안정적인 생활을 했으나 천민신분인 그녀는 고을수령을 찾아 양인신분회복을 요청하게 된다.

그녀는 24세에 스스로 삶을 개척해야 하는 물산객주를 차려 장사를 하게 된다. 그녀는 제주바닷가인 산지에서 객주를 벌였다. 객주를 벌인 지 1년만에 ‘천냥 부자’가 됐다 한다.

물상객주는 남의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업을 하기도 했다. 상인에게 잠을 재워주고 밥을 파는 여관업을 하기도 하면서 물종의 도매업을 벌인 것이다.

그녀는 관기시절 알았던 인맥을 활용해 물류동향 정보를 얻었고, 관기시절 몸에 배인 예절과 대인관계 스킬을 통해 비즈니스는 탁월했다.

가난을 이겨내고 거상이 된 만덕의 파란만장한 삶과 “풍년에는 흉년을 생각해 절약하고, 편하게 사는 사람은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해 하늘의 은덕에 감사하며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활철학을 몸소 실천한 거상 김만덕이었다.

그녀에게는 탁월한 장사 원칙이 있었는데 첫째, 제품단가는 낮지만 많이 팔아 큰 이익을 남기는 박리다매(薄利多賣)였다. 물론 품질은 좋았다.

둘째, 눈앞에 큰 이익 보다 사고 파는 사람에게 합리적인 가격인 정가매매(定價賣買)로 거래했다. 혼자만 돈을 벌면 안 된다는 사고였다.

셋째, 정직한 신용으로 철저하게 신용본위(信用本位)사업을 해 나갔다. 믿음을 바탕으로 성실성으로 사업을 한 것이다.

제주는 쌀과 소금 그리고 생필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를 육지에서 구입하게 되고 제주특산품인 말, 말총, 앙반 갓, 미역, 전복, 오징어를 육지에 판매하는 당시 객주권리로 상권을 장악하고 시장을 움직이는 큰 손이 된 것이다.

물류절감을 포함하여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비즈니스모델(BM)을 실현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위대함은 돈과 권력을 잘 사용할 줄 아는 능력에 있다.

제주에 심각하게 돌았던 역병 이후 흉년이 들어 수천 명의 사람이 굶어 죽었다. 몇 년째 이러한 흉년이 계속되자 1795년, 조정에서 구휼미를 보냈지만 바다를 건너오는 도중 수송 선박이 침몰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만덕은 56세에 전 재산을 털어 육지의 곡식을 500여석 사들여 십분의 일은 자신의 친족을 살리는데 사용했고 나머지 450여석은 구호 식량으로 쓰라고 관아로 모두 보냈다.

만덕이 육지에서 사들인 쌀로 수천명의 제주백성 목숨을 연장시킨 것이었다. 이러한 소문은 정조에게 알려졌고 정조는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 놓은 만덕에게 소원을 말하라고 명한다.

제주를 벗어나지 못했던 제주백성 만덕은 임금이 계시는 한양과 일만이천봉의 금강산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답하고, 정조는 이를 허락한다.

만덕은 58세에 일반인의 최고벼슬자리인 내의원 의녀 반수에 오른다. 다음 해 한 달의 금강산 유람 후 한양으로 돌아온 뒤 그녀는 장안의 화제 인기스타가 됐다.

백성들이 억압받던 시대의 불합리함을 뛰어넘어 기회를 찾아 과감하게 도전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한 김만덕은 백성들과 정치인들에게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정조는 그녀의 개혁적인 삶을 표현한 김만덕전기를 쓰게 했다. 채재공, 정약용, 박제가도 그녀의 기업가정신의 삶을 노래했다.

만덕이 정조의 은혜로 한양에 왔을 때 당시 장안에서 이름을 떨쳤던 기녀 홍도도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칭송하며 쓴 시가 있었다고 한다.

여의행수 탐라기녀가 (女醫行首耽羅妓)

만리 물결에 바람 두려워하지 않았네 (萬里層溟不畏風)

또 금강산 깊은 곳 향해가니 (又向金剛山裡去)

향기로운 이름 교방에 남으리 (香名留在敎坊中)

무엇보다 제주도민들은 지금도 인간 만덕을 의녀(義女)이자 만덕할망으로 불리며 칭송하고 있다.

그녀의 나눔정신을 자랑스럽게 실천,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역병과 모순된 사회관습 속에서도 창의적이고 차별성 있는 비즈니스 추진과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을 온몸으로 실천했던 김만덕.

불멸의 아름다운 그녀의 앙트레프레너십(Entrepreneurship)이 작금의 코로나19시대에 큰 귀감이 되길 기대해 본다.

무엇보다 그녀의 비전과 미션이 만든 상도의(商道義) 원칙준수로 자신과 사회 그리고 국가에 훌륭한 영향을 준 그녀에게서 미증유 시대에 교훈을 얻는다.

/김태철 한국탄소융합기술원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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