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公)은 1874년(甲戌)3월26일 전북 고창군 성송면 삼태(全北高敞郡星松面三台)에서 부친 정종택(鄭鍾澤)과 모친 거창신씨(居昌愼氏)의 셋째아드님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부유한 선비 가정에서 자라 일찍 학문에 전념하여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벼슬길에는 뜻이 없었다.

그러나 학행이 고매하여 향중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때의 무장고을 원님은 크고 작은 일을 자문하여 관리들의 출입이 빈번하기로 남쪽동헌이라 했다.

공은 근엄한 부친시하에 자라면서 어린 시절부터 조석문안과 출입절차를 선현들의 가르침대로 어김없이 지켜서 몸에 배었고,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고 즐겁게 해드리는 것이 자식의 도리임을 일찍이 깨달았다.

어느 봄철에 병아리가 구정물통에 빠져 죽은 것을 모친이 측은하게 여기시며, 내가 잘못해서 어린 생명을 놓쳤다고 무척 속상해 하시는 것을 본 며칠 후에, 서당 가는 도중 산길에서 죽은 병아리 또래의 꿩 새끼 한 떼를 만났다.

어린 마음에 저놈을 한 마리 잡아다가 죽은 병아리 대신 키우면 어머니께서 기뻐하시리라 생각하고 쫓고 다니다가 한나절이 지났다. 그 동안에 서당에서는 집으로 사람을 보냈으니 집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다.
옛날에는 늑대가 많아서 어린이나 부녀자는 변을 당하기도 했으니 놀랄만한 상황이었다.

1892년(壬辰)19세가 되던 봄에 함양오씨(咸陽吳氏)와 결혼하여 다음해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생남을 하였으니 그 이름이 휴석(休碩)이다.

1894년(甲午) 공의 나이 20세가 되던 해 동학봉기로 세상의 민심이 흉흉하고, 치안 부재의 상황이 되자 부친을 모시고 김제(金堤)해안으로 피난해 아버님의 시중을 받들고 틈틈이 바다에 나가 물고기와 조개를 잡아 모았다가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고향의 어머니께 문안인사를 다녔다.

3년 동안을 한번도 거른 적이 없어 고향의 모친은 그날 석양이면 동구 밖에 나와 기다렸다. 백 여리의 먼 길을 이웃처럼 내왕하는 효성에 감탄하여 마을 사람들은 사천댁 천리마(千里馬)라 했다.(行狀抄)

1896년(丙申)에 고향에 돌아와서 안정을 되찾았으나 부친이 급환으로 운명에 이르자 손가락을 깨서 구급했다.

다음해에 돌아가시자 고산중턱의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侍墓)했다.

이때 움막부엌에 밤이면 언제나 와서 자고 가는 호랑이가 있었다. 깊은 산중에 서로 의지가 되면서 호랑이는 공을 주인처럼 따랐다.

초하루 보름이면 집에 가서 치전(致奠)을 드리는데 호랑이가 따라다니니까 어둠이 깔린 후에 집에 오곤 했는데도 호랑이가 따라다닌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날도 집안 아이들이 호랑이 한번 보자고 졸라대서 무심코 그렇게 보고 싶으면 대문 밖 양애밭에 가보라고 하니 등불을 켜들고 아이들이 양애대를 헤치고 들어가 보자마자 기겁하여 소리를 지르며 등불도 버리고 도망쳐 나왔다. 이에 성난 호랑이는 갖은 행패를 부리고 그 후에는 집에 따라 오지 않았다고 한다.(蘆墓日記抄)

모친상에도 아버님 때와 같이 3년을 시묘하였으니 전후 6년의 시묘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으나 양친이 안 계시는 집안은 썰렁하고 구슬프기만 했다.

공은 처자를 데리고 다시 6년 동안 정붙인 고산으로 들어가 삼간초당을 마련하여 고산서실(高山書室)이라 이름하고 집 뒤에 동명단(東明壇)을 쌓아 국태민안과 망부모의 명복을 빌었다.

책 읽고 계곡의 물소리와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대자연의 품안에서 심신수양에 정진하였다. 산중생활에 익숙한 공은 모든 산짐승과 벗하고 수석초목(水石草木)도 함께 했다.

1905년(乙巳)나라의 주권을 강탈당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듣고 공은 책을 덮고 어린 처자만 산중에 남겨둔 채 서실에서 나와 장성(長城)의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을 거쳐 은사 최면암(崔勉菴)을 찾아갔다.

토적소(討賊疏)를 올리다 지친 면암은 제자의 우국충정을 치하하고 영남(嶺南)유림에 격문(檄文)전달을 명하였다. 공은 격문을 갖고 경상도로 직행하여 엄동설한에 풍설을 가리지 않고 경상도 일대를 누볐다.

석양에 찾은 집은 쉬어서 내일 일찍 출발하라고 만류해도 뿌리치면 노담하는 주인에게는 우리가 나라를 되찾으면 한 마을에서 영원히 같이 살자하고 헤어지기도 했다.

처음 만난 사이라 직함을 물어 백두(白頭)라고 하면 감탄하였다. 벼슬도 없는 젊은 선비가 불고가사하고 구국전선에서 동분서주하는 충성에 감동하여 참다운 선비라고 정진사(鄭眞士)라 불렀다 한다.

집 떠난 지 오래되어 의복이 남루하고 피로가 쌓여 행색이 흡사 미친 사람 같은 자신을 발견하고 모양새도 꼭 미친 사람 같거니와 나라 잃은 백성이 온전한 정신으로는 살수가 없어 나는 미칠 수밖에 없음으로 호(號)를 일광(一狂)이라 한다고 자호기(自號記)에 적었다.

1906년 2월, 3개월의 영남순방을 마치고 태인(泰仁)으로 돌아와 면암께 영남정세를 보고하고 면암의 병오창의(丙午倡義)에 참여하여 소모장(召募將)으로 의진의 일익을 담당하고 곡성(谷城)으로 진출하여 파견된 헌병대와 일전을 치르고 순창(淳昌)으로 회군하자 내침한 적군 일대를 성밖에서 격퇴했다.

공은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객사에 포진하고 전열을 정비하는 중 어제 패주한 일군이 전주·남원의 진위대를 앞세우고 다시 순창의진을 공격해 왔다.

1906년(丙午)윤4월20일 황혼의 격전에 적탄이 공의 흉부를 관통하여 선혈이 치솟을 때 “절대로 전열을 흐트리지 말라”고 주변에 당부하고 면암께는 “죽어서라도 선생님을 도와 결코 왜적을 섬멸 하리다”하고 숨을 거두니 공의 나이 33세였다.

별안간에 뇌성벽력과 폭풍우가 몰아쳐서 천지분간을 못하게 되자 총성은 멎고 적군은 철수하였다. 면암은 시신을 안고 통곡하니 진중은 숨 막히는 비통의 도가니에 잠겼다.(獨立運動史第一卷)

면암은 조선의사정공지구(朝鮮義士鄭公之柩)라고 명정을 쓰고 만사(輓詞)에 “해 저문 순창사관에 죽기로 맹세한자 14명중에 그대가 먼저 죽으니 우리에 빛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그 후 황매천(黃梅泉)은 만장에 “전략(前略).....적성강(赤城江) 물이사 흘러흘러 그침이 없으리니 봄풀도 해마다 돋아 나라위한 죽엄을 제사하리라”했다.

또 기송사(奇松沙)는 제문에 “충은 민자의 대의요 효는 인자의 도리임으로 충효는 일본이며 표리의 관계이다. 정군(鄭君)은 사친에 생몰이 여일한 출천의 효자였기에 국난에 처하여 백두서생으로 의연히 생명을 바치는 의용이 있어 효로 시작하여 충으로 마친 짧은 생애는 마땅히 천추에 빛나리라”하였다.

1945년(乙酉)조국이 광복되어 순국선열에 등록되고 1990년(丙午)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해(遺骸)는 고창군 성송면 양사동 안산에서 1994년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 제307호 유택에 이안(移安)되었고 일광기념관이 건립됐다./엄범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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