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현 철 <군산대학교 교양교직과 교수>

체온에 육박하는 한여름의 무더위가 유난히도 잦은 올 여름! 충무로에서는 그 뜨거운 이야기로 관객의 가슴을 싸늘히 식혀줄 두 편의 메뉴를 준비하여 시장에 내놓았다. 흥건한 피로 스크린을 적셔 댄 이 화제작들이 주류영화의 기존 경향에 어떤 효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인지 한번 인색하게 따져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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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개싸이코구나.” 극중 악마인 ‘최민식’이 자신을 제압했다가 고문하고 활동비까지 챙겨서 풀어주는 ‘이병헌’을 가리켜 내뱉는 말이다. 물론 ‘최민식’이 이 말을 하기 전까지도 그는 충분히 악마다웠다.

그는 아무 이유 없이 “살려주면 안 돼요?”라며 담백하고 가녀리게 호소하던 ‘이병헌’의 약혼녀의 목을 치고 토막내었으며, 이제 막 다른 더 어린 희생자를 요리하려던 참이었다. 누가 봐도 대박 싸이코패쓰인 ‘최민식’이 그 희생자 명단에 오를만한 ‘이병헌’에게 부여하는 자격이 바로 ‘완전 개싸이코’라는 것이고, 영화는 이렇게 발생하는 아이러니를 중심으로 전개되려는 듯 했다.

『악마를 보았다』의 엔터테이너로서의 성공 여부는, 바로 이 아이러니 즉 ‘악마적 유사인간’을 응징하는 ‘정상인간’의 푸르디 푸른 복수심이 얼마나 더 악마적일 수 있는가 하는 주제를 생생한 현재형으로 제시해낼 수 있음에 달려 있었다.
 
그리하여 ‘최민식’의 강간과 폭력 질주는 계속되어 나가고, 그를 추적하고 단죄하는 ‘이병헌’의 폭력도 점점 도를 더해나간다. 그런데 영화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계기에 대한 충분한 성찰을 구태여 수행하지 않는다.

왜 ‘이병헌’은 ‘최민식’을 독자적으로 고문하고 응징하지 않는가? ‘친절한 금자씨’ 처럼 관련자들의 복수를 계획하는 것이 그나마 정상인간의 복수의 모습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이병헌’은 다시 그를 악마로서 활동하게 만들고, 또 그런 짓을 했다 하여 (이미 애꿎은 희생자 명단이 길어지고 마는 결과를 감수해가며) 그를 다시 응징 고문하게 된다.

영화가 그 대칭적 복수극이 가질 수 있는 개연성과 써스팬스를 결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의 문제 때문이다. 그러한 결함을 메워주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이병헌’에게 ‘최민식’의 선언처럼 그를 능가하는 ‘완전 개싸이코’로서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 뿐이었다.


허나 영화는 모든 것을 다 잃고 복수의 공허함과 슬픔을 온몸의 전율로서 느껴내도록 되어 있는 ‘이병헌’의 캐릭터를 엔딩에서 전시함으로써, 스스로 그러한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그리하여 남는 것은 단지, 희생자들을 두고 벌이는 두 카리스마간의 개연성 적고 과장된 게임과, 그것의 비주얼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노출되어지는 피와 살점, 그리고 상황과 육체의 역동적 연계성이 자극하는 불쾌감이게 되었다.

제목의 약속대로 관객은 정말 ‘악마를 보았다’! 시각적으로는 선명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모호한 악마를!

악마성의 현시라는 면에서 보면, 제목상 언뜻 심심하고 담백해보이는 『아저씨』도 『악마를 보았다』에 못지 않는다. 그 아저씨의 옆집에 사는 맑고 정감있는 성품을 가진 여자아이의 엄마는, 순간적인 욕심에 그녀가 관련된 조직을 배반한 죄로 무시무시한 형벌을 스스로도 자초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에게도 엄청난 비극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정황에 접해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되는 이 아저씨는 다름 아닌 ‘원빈'이다. 칙칙한 장발을 말끔히 밀어내고, 잠시 선보였던 완벽히 다져진 상체를 단정한 블랙 슈트 속에 가둔 이 국민적 꽃미남은 총 한자루 들고 적진에 홀홀단신 뛰어드는데, 그 상황의 개연성과는 별도로 이 미끈한 육체가 강도 높은 액션장면에서 연출하는 미장센은 그 미려함의 정도가 보통 수준을 넘는다.

특히 손을 사용한 동작부터 손도끼와 칼, 총 등 다양한 도구들을 동원한 중후반의 대규모 대결장면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액션씬의 구성이라는 미학적 성취를 이끌어 내었다 평가받을 만하다.

허나 『아저씨』의 이러한 미려함은 견고한 내러티브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한다. 전직 특수요원으로서의 냉정한 결단과 강인한 의지, 그리고 초인적인 육체적 능력은 ‘옆집 아저씨’가 가질 수 있는 성품의 판타지 버전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집중하는 아이와의 연대감과 부채의식 등은 매우 감상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반면, 그 아이가 대면해야만 하는 엄혹한 현실 상황은 극단적으로 끔찍한 잔인성으로 특징지워지고 있다.

환상적인 수준의 능력을 가진 옆집 아저씨가 오직 한 작은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 올인하는 과정에서 관객이 대면하게 되는 것은, 짜릿한 액션과 잔인한 방식의 처형 그리고 아동 인신매매와 살아 있는 사람의 장기적출이라는 센세이셔널한 것들이다.

나는 『추격자』 이후 상업적인 측면에서 우리 영화의 표현 영역이 확대되는 것을 무척이나 반기고 싶다. 대중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은 채 공허한 이야기들의 무난한 서사에 만족하던 시절에서 벗어난 만큼, 우리 영화판의 성숙도가 높아진 것을 축하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특히 폭력의 묘사에 관련한 영화표현의 풍요로움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작품 내적 완결성의 확충이나 시대적 관련성에 대한 성찰 등 영화 본질의 요구에 부응하는 맥락에서 구현되어야만 한다고 본다.
 
제작진이 보다 더 자극적인 악마성을 구축하여 현란한 미술과 정교한 기술력의 도움을 받아 그를 스크린에 흥건히 전시하고, 이를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다시 그 이상의 폭력과 잔인성이 스크린에서 증식되어나가는 일이, 주류 상업영화의 한 경향으로 자리잡을 때, 우리는 그러한 제작의도 자체에서 ‘악마성’을 읽어내게 될 지도 모른다./투데이안 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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