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에 흐르는 그리움

-천경자 화백을 그리워하면서...

 

 

                                          

 

 

                            김생기 나래코리아 대표

 

 

 

천경자 화백의 그림은 석양이 뉘엿뉘엿 질 무렵에 보는 것이 더욱 운치가 있고 컬러감을 느낄수 있어서 좋다.

화폭에서는 스카이블루에 하얀 색을 더하여 주홍빛은 옅게 핑크빛을 발하는 갈색의 머릿결이 금색을 입어 비로소 전생에 황후였다던 그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황혼은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서 어둠의 시간으로 이끄는 아름다운 안내자이다.

광주역 근처 뱀탕집에서 꿈틀거리는 뱀들을 20대 초반의 여성이 앉아서 몇 시간 동안이나 스케치를 하고 꽃뱀에 물려죽은 그녀의 고향이기도 한 고흥의 소녀를 생각하면서 죽도록 사랑했었던 그이의 나이만큼 35마리의 뱀을 그려냈다.

1952년 전쟁 중에 부산에서 열린 다방 전시회에 뱀 작품이 걸렸을 때, 사람들은 젊은 처자가 뱀을 그렸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나는 그녀의 작품을 만나 그녀와의 전설을 들었으며 수려한 그녀의 수필집을 통해서 보다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새벽까지 정신없이 수필집을 읽었다.

수려한 문체와 극적인 상황 그리고 솔직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에 반해 버렸다. 천경자 화가의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에 A급 작품이 93점 기증이 되어 있어서 화랑이나 개인 컬렉터들이 가지고 있는 작품은 그리 많지가 않다.

인사동에서 연락이 오면 그날은 만사 제쳐놓고 그림을 보았다. 주로 B급이나 C급이 많았고, A급은 그다지 볼 기회가 없었지만, 그림을 보고는 석양이 넘어가는 시간에 인사동 근처 술집에서 막걸리와 치즈에 빨간 레드와인을 마시면서 그녀의 작품들을 다시금 음미해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수필집에서 언급이 많이 되었던 막내아드님인 ‘쫑쫑이’ 김종우님의 분당세종문고 대표로 계시다는 것을 알고 전화를 걸어 면담을 신청해서 만나 뵐 수 있게 되었다.

천경자 화백 작품

김 선생님으로서는 어머님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온다고 즐겁게 약속을 잡아주셨던 것이다.

개구리를 잡아오라고 하시면 친구들과 같이 개구리를 잡아다 드렸는데 어머니께서는 개구리의 뒷다리를 묶던지 풀어놓으시고는 스케치를 하셨다고 한다.

일본에 갈 때면 천 선생님이 쓰시던 석채를 사다가 드렸는데 그램 단위로 파는 석채가 상당히 가격이 나갔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천경자 화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세종문고에서 펴낸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까지 선물로 주셔서 그날 밤을 세워 읽어버렸다.

내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아드님 김종우님은 아버지인 남봉 감남중 선생같이 미남이었고 부모님을 닮아 키가 크고 멋진 본이었다.

그런 그가 그로부터 4년후에 어머님을 남겨두고 저세상으로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먼저 떠나셨다. 참으로 아쉽고 안타깝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천경자 선생님은 편안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오직 그림하나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사셨다.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미인도’의 위작사건으로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어 절필을 선언하고 큰딸인 이혜선님이 살고 있는 뉴욕으로 가서 그녀의 수필집 제목처럼 ‘한’ 많은 인생을 살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황혼이 흐르는 저녁에는 그녀을 생각한다. 그녀의 그림은 밋밋하지가 않다.

작품을 찬찬히 음미하면서 탱고를 들으며 레드와인을 마시고 싶다.

상처를 입은 채 떠난 천 화백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아도 그녀를 위로하고 추모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있는 한 저 세상에서는 편안하실 것이다.

그녀의 고향인 고흥반도에 황혼이 내리면 혁띠인 줄 알고 꽃뱀을 잡다가 물려죽은 어린 소녀와 소록도에서 찾아온 예쁜 길례언니,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동생 옥이 그리고 사랑했던 연인의 이야기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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