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서부보훈지청 주무관 김건곤

/전북서부보훈지청 주무관 김건곤

“저게 우리나라에서 진짜 있었던 사건인가요?”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저렇게까지 참혹한 줄은 몰랐어요.”

며칠전 있었던 익산 아하데이 나눔축제에서 우리지청은 보훈 홍보관을 운영하며 다양한 사진전과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 중 5·18 민주화 운동 특별사진전을 관람하던 학생들로부터 좀처럼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들이 터져 나왔다.

올해는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8년째 되는 해이다.

어린 학생들은 교과서에 나오는 사건으로만 기억하지만 그 당시 학생이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아픔으로 남아 있다.

또한, 5·18 민주화 운동이 우리나라에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리게 한 밑거름이 됐지만, 아직도 5·18을 폄훼하고 왜곡하는 주장들이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1980년 5월, 뜨거웠던 광주, 도대체 그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 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돼, 조속히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과 5·17 쿠데타를 주도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신군부 세력의 퇴진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 운동이다.

당시 광주 시민은 5·17 비상계엄의 전국적 확대 조치로 인해 발생한 민주화 역행 조치에 항거했으며, 신군부는 사전에 훈련받은 공수부대를 투입시켜 무력으로 진압했다.

시민들은 민가나 관공서로 피신했지만 군대는 탱크까지 동원해 모든 도로를 차단하고, 추격해 체포하고 학살했다.

이에 성난 학생들과 시민들은 합세해 더욱 거세게 저항했고, 일부 학생들은 도청을 점거하고, 경찰서 등에서 총기를 탈취해 저항했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시가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정규군에 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 종교인, 교수 등이 주축이 돼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됐고, 시민군에게 총기를 반납할 것을 설득해 무장을 해제했다.

그러나 계엄군의 무자비한 학살은 멈추지 않았다.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했기 때문에 이러한 비극의 현장은 외부에 즉각 알려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유언비어처럼 전해지면서, 차츰 언론에 보도되고 그 참상이 드러났다.

당시에는 불순분자와 폭도들에 의한 난동으로 규정됐지만, 1988년 6공화국 출범 직후 국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됐고, 1988년 11월 사건규명을 위한 국회청문회가 개최됐다.

1995년에는 '5·18특별법'이 제정됐으며 1997년엔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2002년에는 5·18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5·18 사망자, 부상자, 기타 희생자 분들이 보훈대상자로 인정됐다.

5월이 되면 우리는 왜 그 날을 잊지 말아야 하는가?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오늘날 정치,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생활민주주의를 실천하게 된 밑거름이 됐다는 것, 그 이후로 평화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됐다는 점이다.

지난해 국민들이 촛불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보여준 민주의식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4·19민주혁명을 시작으로 5·18민주화 운동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져 만들어진 결정체인 것이다.

국가보훈처에서는 매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을 거행한다.

본 행사에 참석하면서, 혹은 집에서 TV로 시청하면서 이번에는 단순히 하나의 연례행사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5·18 민주화 운동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희생자분들께 따스한 위로가 되길 바라고, 단 한번만이라도 사회의 약자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우리 나라, 우리 국민 모두가 갈등을 넘어 민주화라는 소중한 가치위에 하나가 될 때까지 5·18 민주화 운동을 기억하고 그 정신이 계승됐으면 한다.

이번 5월은 그러한 5월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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