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를 흔히 호남이라고 부르며, 호남은 전라도를 일컫는 대명사가 됐다.

하지만 정작 호남땅(익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왜 전라도를 호남이라고 부르는지 그에 대한 정확한 유래(이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익산이 다양한 ‘호남’ 유래설(금강유래설, 벽골제호유래설, 요교호 유래설, 기호지방유래설)의 발원지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잘 알지 못 한다는 것은 익산에 살고 있는 시민으로서 조금은 애석한 일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호남의 첫 관문 익산에 관련한 호남의 유래설에 내용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요교호 유래설을 찾아서...

호남(湖南)의 한자를 해석해보면, 호수의 남쪽이 된다. 그렇다면 호남이란 명칭은 어떤 한 호수의 남쪽부분을 지칭하는 것인데, 그 호수가 어딘지에 대한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으며 유래설만 존재한다고 학계에서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유래설 중 하나가 우리 익산에 있는 요교호(황등제) 유래설이다. 이 유래설은 조선시대 '동국문헌비고'를 근원으로 한다.
 
이 문헌에 따르면 요교호의 둘레는 25리에 이르며, 김제 벽골제와 고부(정읍)의 눌제와 더불어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제언으로 3호(三湖)의 칭호를 받았다. 더욱이, 호남(전라도)라는 명칭의 유래도 이 요교호로 말미암아 생기게 됐다고 전하고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도 황등제로 분명하게 명시돼 있고, 조선시대 실학자 유형원은 '반계수록'에서 ‘호남의 황등제, 벽골제, 눌제를 잘 정비한다면 노령산맥 이남은 흉년이 없을 것’이라고 저술하고 있다.

 

요교호는 어떤 호수 인가?

미륵산 서북쪽 기슭에 위치한 금천에서 발원하는 요교호(황등제)의 위치와 규모를 밝혀줄 수 있는 문헌으로는 ‘동국문헌비고’ 유형원의 ‘반계수록’,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일제 강점기 때 작성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등이 있다.

이 중 '동국문헌비고'를 살펴보면 위에서 언급한 바가 있듯이 ‘호의 둘레가 25리에 이르며, 오늘날 황등면, 삼기면, 월성동, 신용동 부근의 넓은 들에 자리한 큰 호수가 있어 나룻배로 건너다녔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 원광대학교에서 강경으로 넘어가는 길(국도 23번)을 지나다보면 탑천을 가로지르는 다리하나가 나오는데 이를‘허리다리’라고 한다.

 
그 허리다리 안쪽(금마방향)으로 요교호가 존재했으며, 그 요교호를 가로지르는 제방(뚝)을 축조했다. 그 길이가 약 1.3km였다고 한다. 현재 23번국도가 지나는 그 길목이 제방이 자리하고 있건 곳이다.

허리다리(요교) 옆에는 황등제의 존재를 입증해주는 요교비가 세워져있다. 이 요교비에는 일제 강점기 황등제 수축공사를 하던 도중 발견 된 비석으로, 정조 45년 서기 1780년 무너져 내린 제방을 수축하는 공사와 교량을 가설했다는 내용이 기록이 돼있다.

요교호는 백제시대 때부터 있었다고 하나, 정확히 언제 생겼고, 언제 없어졌는지는 단정 지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역사적 문헌들은 요교호의 존재에 대한 내용을 확실하게 뒷받침해준다.

 
더욱이 황등면에 도선(배 나들이)마을, 뱃길마을, 어곳마을, 섬말(섬마을), 샛터 등 수로와 관련이 된 지명이 요교호의 존재를 더욱이 확실하게 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요교비 외에는 황등제(요교호)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단지 허리다리에서 금마 방향으로 보이는 넓은 들을 보며, 과거에는 그 곳에 푸른 물결이 출렁였을 모습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4대 고도지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익산에서 요교호의 존재는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곳이며, 한 편으로 일제 강점기 식량수탈의 아픔기억을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 익산은 고도지구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다. 백제 무왕이 물길을 갈랐던 요교호도 고도지구와 함께 숨 쉬는 익산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도 우리가 조금 더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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