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소 D (김정숙, 1975년)

밤이 깊어 가는데 알 수 없는 생각에 잠들지 못하고 있다.

어릴 적 앨범을 내려보기도 하는데 그 순간 눈이 머문 곳은 도록과 토르소였다. 토르소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잊을 수 없는 어느 여인과의 인연을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서울 배재고등학교 4학년생인 17세 소년 김은우는 숙명여고 3학년생인 16세 소녀 김정숙을 그 당시 삼청공원 스케이트장에서 만났다.

소년은 정숙을 좋아했으나 그 소녀는 수줍어하며 피한다. 은우는 스케이트를 선수같이 잘 탔으나 정숙은 처음으로 타는 날이었다.

진도가 얼마나 잘나가겠는가? 그러나 정숙은 부끄러워서 그날 이후로 스케이트장에는 나오지 아니했으나 사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은우를 교회에서 재회할 수 있었고 이후 오빠와 동생처럼 지냈다.

소년은 연희전문학교 즉 지금의 연대 문과에 진학하고 그 이듬에 정숙은 이화전문학교 즉 지금의 이대 가사과에 진학해 둘은 매일 신촌역에서 만나고 이야기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점점 애틋함이 싹트게 됐다.

은우가 3학년이고 정숙이 2학년이 되던 1937년 5월 1일에 22세와 21세의 젊은이들은 마침내 결혼을 했다.

이대에 재학중이던 정숙은 불가 학칙에 의해 퇴학을 당했다. 그때 은우는 약속했다. 결혼하고 나서 기회가 되면 학업을 다시 시작하라고.

오직 남자만 보고 그의 말에 따르다보니 정숙은 어느새 3남매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은우는 일본 릿교대학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연대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아내인 정숙에게 다시 공부할 것을 제안했다.

드디어 엄마 정숙은 홍익대 윤효중 교수의 제자가 되어 한국 최초의 여류 조각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홍대 졸업 후 미국에 유학을 다녀와서 본격적인 작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74세의 나이로 1991년에 다음 세상으로 여행을 떠난다. 1917년 태어나서 1991년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2004년 어느 날이었다. 자주 다녔던 인사동 대아화랑에 가서 그날도 박영인 사장님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노년의 신사가 한 분 오셨다.

연대 교수를 정년퇴직하고 미국의 자녀들과 같이 살려고 하는데 ‘토르소 D’를 매매하려고 가져오셨다고 한다.

칸초네, 알바초의 첫 입맞춤처럼 여인의 토르소가 좋아서 박 사장님께 양해를 구해 중간거래 비용을 지불하고 얻게 됐다.

김정숙 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김정숙 작가의 ‘토르소 D’는 1975년에 제작한 것으로 1992년 작가 타계 1주기를 맞아 호암갤러리에서 개최한 회고전에 전시됐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인연을 만나게 된다. 작품도 마찬가지다. 미술 작품과 인연을 맺을 때에는 다음 세 가지 기준으로 선택하면 된다.

가지고 있다가 더 큰 가치를 인정받아 다른 사람에게 갈 수 있는 작품인가? 나는 장욱진 화백의 4호 그림을 5,800에 샀다가 1억에 경매했던 경험이 있다.

두 번째는 그 작가와의 추억과 관계를 가지면서 공부도 할 수 있는 작품이면 좋다.

세 번째는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가다가 좋아서 첫 사랑에 빠지는 느낌으로 구입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택하게 된 미술 작품은 우리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하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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