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거슬러 익산을 만나다
- 국립전주박물관 특별전 <전북역사문물전12 익산> 두번째 이야기...
- Ⅲ 부흥의 터전, Ⅳ 전라도의 첫 고을
전북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는 ‘전북역사문물전’ 열두 번째 ‘익산’ 특별전이 내년 2월 9일까지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국립전주박물관 소장 유물을 비롯해 미륵사지유물전시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등 전국 각지 익산 관련 유물과 전시품을 한자리서 만날 수 있다. 총 4부 가운데 지난 편에 이어 3부와 4부를 소개한다.
# Ⅲ부 부흥의 터전
▲ 부흥의 터전, 익산
익산지역은 위만에게 쫓긴 고조선 준왕이 내려와 재기를 꿈꾸던 곳이며, 백제 무왕 역시 익산을 발판으로 삼국을 통일하고자 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867~936)은 후백제 건국의 정신적 뿌리를 금마산 즉 익산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미륵사개탑(彌勒寺開塔)이나 왕궁리 오층석탑 조성, 사리의 재봉안 등 익산지역에서의 다양한 불사(佛事)를 통해 백제를 계승했음을 대내외에 드러냈다.
왕궁리오층석탑의 해체, 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금동불상은 대좌와 함께 주조한 금동불에 얇게 투각한 당초무늬와 불꽃무늬의 거신(擧身)광배를 결합한 형식이다.
뒷면의 주조 구멍은 머리에는 없고 몸 전면에서 다리까지 큼직하게 뚫려 있는데, 내부의 주물이 매우 거칠다.
목 아랫부분에는 광배를 끼웠다 뺐다 할 수 있도록 촉이 달려 있다.
이 금동불처럼 광배까지 한 세트로 온전히 전하는 통일신라 말의 불상은 많지 않다.
출토지가 후백제 영역이었던 익산 왕궁리인 점에서 제작시기를 비롯하여 발원자의 문제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 불심 가득한 땅
고려시대에는 산과 물가에 사찰, 탑, 석불 등을 조성했다.
고려시대에 번성한 익산지역의 사찰은 삼국시대에 창건된 미륵사(彌勒寺)를 비롯하여, 심곡사(深谷寺)․숭림사(崇林寺) 등이 있다.
고려말~조선초에 만들어진 숭림사 청동은입인동문향로(靑棟銀入忍冬文香爐)는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체높이 14.6㎝로 뚜껑 중앙부에 사자상의 손잡이가 있고, 옆구리에는 사자머리형의 손잡이가 조각되어 있으며, 금으로 모란, 당초문을 은입사했다.
# Ⅳ 전라도의 첫 고을
‘춘향가’에서 이몽룡은 남원으로 내려갈 때 서리(書吏)와 역졸(驛卒)들에게 ‘전라도 초입(初入), 여산읍’에 가서 기다리라 말한다. 이 여산읍이 바로 익산 여산이다. 익산은 충청남도에서 전라북도로 넘어오는 첫 길목이자, 첫 고을이었다.
불상은 크고 긴 눈, 짧은 코와 작은 입을 가졌고, 오른쪽 어깨에 걸쳐있는 법의는 부드럽게 흘러내려 결가부좌한 무릎 위를 덮었다.
뒤판의 상단 중간과 하단 좌우측에는 끈을 꿸 수 있는 작은 고리가 있다.
연당초문 그리고 기타의 수법 등과 불상의 광배 뒷면에 ‘남선인(男善人) 신축정월일(莘丑正月日) 김세소(金世昭)’라는 명문이 남아있어 만든 시기는 1361년임을 짐작할 수 있다.
▲ 이웃한 네 고을
조선시대 익산지역은 여산(廬山), 용안(龍安), 함열(咸悅), 익산(益山) 네 개의 고을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 네 고을은 1895년 목(牧)․부(俯)․군(郡)․현(縣)의 명칭을 군으로 통일하고 23부에 예속시키는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할 때 여산군, 함열군, 용안군, 익산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전주부의 관할이 되었다.
1914년에 네 개의 군은 통폐합되어 익산군이 되면서, 비로소 한 고을이 되었다.
▲ 익산이 품고 낳은 사람들
조선시대 익산지역에서는 여러 방면에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고, 또 모여들었으며, 죽어서 묻혔다.
관계(官界)를 대표하는 인물로 좌찬성에 이른 소세양(1486~1562)을 들 수 있으며, 학계(學界)를 대표하는 인물은 훗날 노론과 소론 사이 논쟁의 단초가 된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지은 유계(1607~1664)가 있다.
이밖에도 다방면에서 인물을 배출한 연안이씨(延安李氏) 집안사람들, 초서를 잘 썼던 호산(湖山) 서홍순(1798~?), 원불교의 창시자 박중빈(1891~1943)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근대도시 익산의 명과 암
전라도의 근대도시 하면 군산을 많이 떠올린다.
특히 호남선과 군산선 등의 철도부설과 일본인들의 이주로 익산의 새로운 중심이 된 이리지역은 근대도시로의 발전이 가속화되었지만, 익산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농장과 수리조합의 결탁으로 익산 사람 대부분의 삶은 더욱 더 피폐해졌으며, 이에 대항해 소작쟁의(小作爭議)와 수리조합반대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