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영 작가의 '전주가 설레기 시작했다' 아홉번째 이야기

2025-06-05     엄범희 기자

<아홉번째 이야기>평화동에서 자가시대를 열다

[투데이안] 결혼하고 6년 만에 은행의 큰 도움을 받아 내 집 마련을 했다. 아이 둘이 커가면서 공간이 조금 넓은 곳으로 이사를 하기 위해 무리를 했다. 분양가의 3분의 2 정도를 대출받을 요량으로 평화동에 있는 동아현대아파트를 분양받았다.

계약금과 1차 중도금까지는 어떻게 준비할 수 있었으나 2차, 3차, 잔금 마련은 대출을 받아야 했다. 매회 중도금 마련을 위해 가계부를 쓰며 지출 항목은 줄이고 악착같이 모으기 시작했다.

먹는 것을 줄여 장은 거의 보지 않고 간장 백반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옷도 지인으로부터 얻어 입히며 거의 사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외환위기까지 겹쳐 월급마저 줄어들던 시기를 보냈다.

힘든 과정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아파트부지를 찾아 한층 한층 오르는 아파트를 보는 것으로 위안을 삼곤 했다.

입주 안내문이 왔다. 아직 마무리가 덜 돼 여기저기 장비와 자재가 널려 있었으나 하루라도 빨리 입주를 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이사를 했다. 새집 증후군이 있다는 우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덜 빠진 시멘트 냄새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처럼 새집으로 이사한 기념으로 가구와 가전을 새것으로 바꾸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교체를 하고 싶었으나 현실적인 여건으로 꼭 필요한 것만 교체하기로 했다.

신혼 때 샀던 냉장고를 교체하고, 이전 집에는 없던 텔레비전과 소파도 구입하고, 탁 트인 넓은 거실 창문에는 새하얀 커튼을 설치했다. 아이들은 엘리베이터가 신기한지 타고 오르내리기를 반복하고, 눈만 뜨면 아파트 놀이터를 찾아 뛰어다녔다.

어른인 나조차 차량에 눈을 덮어쓰고 달리는 차량을 보면서 지하주차장이 있는 아파트에 산다는 것에 감사했다. 이렇게 꿈만 같았던 자가시대가 시작됐다.

취업으로 분가를 할 때까지 한 번도 자가에 산 적이 없다. 어릴 때는 남의 집에 월세를 전전했고, 초등학교 때부터는 산날망 무허가 슬레이트집에 살았다.

지대가 높아 낮에는 수돗물이 나오지 않고 남들이 사용하지 않는 새벽에 일어나서 물을 받아 놓았다가 사용해야 했다. 김장철과 겨울철에는 온 가족이 함께 배추와 연탄을 손에 들고 나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주택이 오래되고 낡아 시멘트 벽틈 사이로 연탄가스가 새어들어 가족이 큰 위기를 겪었던 일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를 할 때면 주거형태를 물어보곤 했는데, 자가, 전세, 월세 중에서 매번 월세에 손을 들어야 했던 슬픈 기억이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다.

그때 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됐으며 어른이 될 때까지 자가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성장했다.

공무원 임용을 받아 서울로 상경해 직장 동료와 같이 2층 단칸방을 월세로 빌려 생활했다. 공동생활이라 불편함은 있었으나 드디어 독립을 시작했다는 자존감이 더 컸다. 함께 사는 직장 동료가 동기생이어서 첫 직장의 설렘을 안고 서로 위로하며 하루하루 즐겁게 지냈다.

결혼을 위해 집을 준비하면서 자금이 부족해 2층 주택 지하층 단칸방을 월세로 구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좁아 장롱을 들이지 못해 난간을 절단했던 일, 하수구가 막혀 오수가 역류해 부엌으로 넘쳐났던 일, 지하층은 습기가 많아 진드기를 퇴치하기 위해 피운 연막탄이 화재로 오인돼 119가 출동했던 일 등등.

웃지 못할 슬픈 사건들로 신혼생활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래도 함께여서 잘 이겨내며 좋은 추억으로 만들어갔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평화주공임대아파트에 봉사활동을 다녔었다. 취약계층이 거주하는 가구는 봉사단체들이 날짜나 요일을 정해 교대로 지원을 하고 있었다.

우리 회사도 지정을 받은 가구에 한 달에 한 번 방문해 생필품도 전달하고 청소도 해주며 어려운 점이 있는지 살펴보곤 했다. 그곳에 있는 분들은 복지관에서 무료배식을 받아 점심을 먹고 남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저녁과 다음 날 아침까지 해결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세계 몇 위의 경제 대국이라 요란을 떠는 우리나라에 이처럼 어렵게 생활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에 무척 부끄러웠던 기억이 남아 있다. 이를 계기로 봉사단체에 후원을 시작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그나마 위안을 삼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주택 마련이다. 산업이 발전할수록 일자리가 줄어들어 취업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취업이 어렵다 보니 경제 활동을 못하게 돼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없게 된다. 이에 더해 집값도 천정부지로 뛰어오르다 보니 가뜩이나 힘든 젊은이들에게 내 집 마련은 생각도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은 아예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결혼을 했어도 아이를 가지려는 생각을 쉽게 가질 수 없는 환경이 돼 가고 있다.

젊은이들이 집을 구할 수 없게 된 이유에는 우리 기성세대의 책임도 있는 것 같다. 인구 감소로 인해 주택 보급률이 높아지고 있음에도 주택가격이 내려가지 않고 더 올라가는 이유는 주택을 주거의 개념이 아닌 투자의 개념으로 여겼던 우리들의 책임이다.

물론 우리 시대는 집 없는 설움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던 시절이라 내 집 마련은 인생의 가장 큰 목표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바뀌었으니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주택을 소유의 개념이 아닌 점유의 개념으로 변화시켜야 한다.

굳이 집을 구입하지 않아도 죽을 때까지 주거에 대한 걱정이 없어야 한다. 양육도 국가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엄청난 국가 빚에 더해 기성세대에 대한 노후 책임까지 떠안은 젊은이들에게 아이의 양육까지 책임지라고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양육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까지 더해져 젊은이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양육에 대한 부담 없이 출산을 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젊은이들이 취업과 주택, 출산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많은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돼 젊은이들이 원하는 직장에서 자신의 일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양육에 대한 부담 없이 언제든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택형태를 굳이 자가, 전세, 월세로 나누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꾸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