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영 작가의 '전주가 설레기 시작했다' 첫번째 이야기

2025-04-10     엄범희 기자

<첫번째 이야기>팔복동에서 꿈을 꾸자

[투데이안] 봄이 되어 팔복동 이팝나무 철길을 걸었다. 몇 해 전부터 사오월이 되면 팔복동 철길 옆을 따라 피는 이팝나무 꽃을 보기 위해 전주시민은 물론이고 전국의 사진작가와 여행객이 모여든다. 이팝나무가 이팝나무지 별거 있나 싶어 찾지 않다가 소문에 소문이 돌면서 한 번은 가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어머니와 함께 찾게 되었다. 목적지에 다가갈수록 차량의 속도가 늦어지며 사람들도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상과 달리 이팝나무 철길 위를 서서히 진행하는 열차를 마주하는 풍경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예술 작품 그대로였다. 봄이 되면 찾아야 할 명소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이팝나무를 배경으로 마음껏 사진을 찍고 옆에 위치한 팔복예술공장을 찾았다. 10년 전,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카세트테이프 제조공장에 문화와 예술의 혼을 불어넣어 전주형 예술교육 플랫폼으로 무한 상상 예술놀이터가 탄생하였다. 황량했던 지역에 많은 작가들이 입주하여 활동하고 있고, 공연과 각종 프로그램, 창작활동 등으로 생기 넘치는 공간이 되었다. 옛 공장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예술공장의 여기저기를 거닐던 어머니는 잠시 의자에 앉아 상념에 잠긴 듯했다.

막 입구를 들어서는데 공장 한편에서 젊은 사람 앞에 서 있는 아버지가 보였다. 반가움에 막 부르려는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젊은 사람이 아버지에게 뭐라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전거에서 급히 내려 다가서는데 아버지에게 화를 내며 소리를 치고 있었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 아버지에게 함부로 하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달려들어 왜 그러냐고 따지게 되었다. 일순간 공장 동료들이 쫓아와 나를 떼어내어 구멍가게로 데리고 갔다. 이런저런 설명을 하였지만 결국 그 사람은 택시 회사의 사장인데 그 사람이 거래처를 바꾸어 차량 수리를 맡기지 않게 되면 공장에 타격이 생겨 아버지에게도 좋지 않으니 참으라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모습을 볼 자신이 없어 그대로 집으로 왔다. 그 후에도 아버지에게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동차공업사에서 선반 일을 하는 공장 노동자이셨다. 아버지가 일하시는 공장이 집과 고등학교 중간에 있어 학교가 일찍 끝나는 날이면 가끔 들러 아버지를 보곤 했었다. 이 일이 있은 후로는 아버지를 보러 공장에 가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사장이라고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아 속상하고 마음이 무척 아팠다. 그 사건을 계기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꿈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어릴 적 쇠로 된 방문고리를 잡으면 겨울에는 차고 여름에는 뜨거웠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는 그런 쇠붙이를 평생 깎고 조이고 만지며 사셨다. 팔복동 공단은 우리 가족 6명의 생계가 달려있는 아버지의 직장이었다. 휴일을 빼고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뒷좌석에 도시락을 멘 자전거를 타고 완산동에서 팔복동까지 20리 거리를 다니셨다. 그런 모습을 평생 지켜보며 함께 하셨던 어머니가 아버지를 떠올리고 계시는 것 같았다.

퇴직을 하고 송달업무를 하였었다. 맡은 지역이 팔복동도 포함되어 일주일에 며칠은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외곽의 모습은 조금 바뀌었으나 내부로 들어서자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골목길은 좁아 차량이 들어가기도 어렵고 굽이굽이 교차 보행도 쉽지 않은 곳이 많았다. 서류 전달을 위해 집안에 들어서면 예전 구로공단 쪽방촌을 연상케 하는 모습 그대로인 곳도 많았다. 방과 부엌의 구분도 없는 슬레이트 지붕 아래서 연탄을 사용하는 부뚜막에 앉아 끼니를 해결하고, 여러 세대가 공동변소를 사용하며 하루하루 힘겨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6-70년대 공장 근로자들의 고단한 삶이 아직도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80년대 산업화를 거치며 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화려한 도심의 조명이 춤출 때 빛의 반대편엔 더 칠흑 같아지는 어둠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로부터 떨쳐 나오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선 어머니는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공연장으로 발길을 옮기셨다. 젊은이들의 활기찬 목소리와 율동을 보며 조금씩 환한 미소를 지으며 현실로 돌아왔다. 모처럼 청년들과 함께 하는 자리여서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고 앙코르 곡까지 듣고 나니 해가 지고 주변이 어둑어둑해졌다. 문을 닫는 공장이 많아지면서 팔복동의 저녁은 침묵과 어둠으로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팔복예술공장이 어두운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10년 전에 서울 문래동에서 일 년간 살았다. 문래동은 철공소 밀집지역으로 기계부품을 생산하면서 호황을 누렸으나 중국산 부품이 대량 유입되면서 문을 닫는 철공소가 많아졌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입주하기 시작한 다양한 예술인들이 문래예술공단을 만들어 예술과 철공소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버려진 철과 낡은 연장들을 활용하여 재탄생한 작품들이 거리 곳곳에 배치되어 있고, 철공소와 예술인 공방 사이사이로 벽화, 조형물이 있어 사진 찍기에도 좋은 장소이다. <어벤저스 2>와 <아저씨>, <특별시민> 등 영화와 <추리의 여왕 시즌2>와 같은 드라마, 각종 예능의 촬영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으니 철에서 예술 꽃이 피어난 것이다.

몇 해 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6년 넘게 글을 쓰고 있고 여러 권 출간도 하고 예술인 증명도 받았으니 예술인의 사명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상을 바꾸는 여러 분야가 있지만 예술도 그 중 중요한 하나의 영역이 아닌가 싶다. 경제적 성장을 통한 변화도 있지만 지치고 힘든 사람들의 육신과 마음을 토닥여 줄 정신적 위로는 예술가의 몫이라 생각한다. 노동자의 아들로 살다 예술가의 대열에 들어서면서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본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