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전북의 어른 푸른돌·취석 송하진, 서울-전주서 최초 '서예 초대전'

2024-09-22     엄범희 기자

[투데이안] 푸른돌·취석 송하진 전 전북도지사가 서울과 전주에서 서예 초대전을 연다.

반평생을 행정ㆍ정치가로 살아온 송 전 전북도지사가 처음 여는 서예전이여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는 오는 9월 25일부터 10월 1일까지, 전주 현대미술관에서는 10월 11일부터 11월 10일까지 취석의 혼이 담긴 글을 볼수 있는 기회다.

취석은 국내 서예의 거장인 강암 송석용 선생의 막내아들로 어려서부터 강암 곁에서 늘 붓을 놓지 못하고 서예를 익혀왔다. 자연스럽게 강암의 서예를 전수받은 셈이다.

40여년 동안 서예와는 동떨어진 행정관료로서의 길을 걷기도 했지만 다양한 분야에서 서예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왔다.

그는 행정고시 합격후 20년 넘게 행정관료로 활동하다 민선 전주시장(2선)과 전북도지사(2선)를 역임하면서 탄소산업 등 전북발전에 한 획을 그은 전북의 어른이기도 하다.

◆취석의 꿈은 '훌륭한 시인과 서예가'

1952년 4월 29일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서 서예가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  선생과 농사짓는  이도남(李道男)  여사의  4남2녀 중  여섯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966년 김제에서 전주로 이거해 현재까지 살고 있다. 

어려서부터, 글을 쓰는 문학과 글씨를 쓰는 서예에 소질을 보여 장차 훌륭한 시인과 서예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이는 할아버지로부터 비롯되어 아버지와 형제들에 이르기까지 가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었다.

◆아버지 강암, '창씨개명 단발령 거부, 선비정신과 민족정신의 산 증인'

아버지 강암 선생은 일제시대 창씨개명과 단발령을 거부하는 뜻에서 평생을 상투틀고 갓 쓰고 우리 민족 고유의 하얀 한복을 입고 사셨다.

한문학과 서예5체, 사군자에 전념해 현대적 감각의 예술정신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지조와 의리를 지키고 산 선비정신과 민족정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러한 강암의 정신은 할아버지 유재 송기면(裕齋 宋基冕) 선생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유재는 글씨보다는 문장이 더 뛰어났다.

문장보다는 행실이 더 뛰어나 사람들은 ‘필불여문(筆不如文) 문불여행(文不如行)’이라 칭송했다.

강암은  16세에  이도남  여사와 결혼했다.

장인이신  고재  이병은(顧齋 李炳殷) 선생은 심성은 책으로 육체는 농사로 길러야 한다는 신념으로 농사와 학문에 전념한 유학자로 역시 강암에게 영향을 줬다.

할아버지 유재는 청년기엔, 전북지역 서화에 선구적 영향을 미치고 서양철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학자로 알려진 석정 이정직(石亭 李定稷)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중년기엔  3000명 이상의  제자를  키워내고  100권 이상의  저서를  펴내며 조선시대 유학을 마지막으로 꽃 피운 인물로 알려진 간재 전우(艮齋 田愚) 선생의 제자가 됐다.

따라서 유재가문은 자손과 혼맥을 통해 학문과 서화에 능한 사람이 많았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취석 또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취석, 어릴때 꿈과 달리 민선 전주시장(2선), 전북도지사(2선) 역임

그러나 글 잘 짓고 글씨 잘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어렸을 때의 꿈과 달리 취석은 법학과 행정학을 전공하게 됐다.

행정고시를 통해 행정가의 길을 걷다가 정치의 길에 들어서 전주시장과 전라북도지사로 16년간 봉직했다.

전통적 분위기의 가문에서 자라고 현대적 교육을 받은 취석의 학문적 소양과 예술적 기질은 정책을 구상하고 집행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세계적 명소가 된 전주  한옥마을을  가꾸고  유네스코음식창의도시와  국제슬로시티로  부각시켰다. 

홀로그램산업, 전라감영복원, 문화관광재단 설립, 전북문학관과 국악원, 세계서예 전북비엔날레의 중흥은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취석의 초기 서예, 사군자 등 강암 영향 커 ... 하지만 정치 이후 생각 크게 바뀌어

취석의  서예는  당연히  아버지  강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예·해·행·초서의 5체와 사군자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다양성을 중시했다.

50대 중반까지는 여느  서예가와  마찬가지로  구양순, 안진경, 동기창, 황산곡, 왕탁, 우우임 등 중국서예가들의 비첩을 주로 공부했다.

그러나 정치의 길에 들어서면서 서예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게 됐다.

정치과정은 시민과 도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바 대중들이 서예를 접할 때마다 잘 알지 못하는 한자 한문과 어순 때문에 매우 당황해하고 부끄럽게까지 느끼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래서 서예도 일반시민이 쉽게 접근해 즐기는 예술이 될 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취석의 서예, 담백ㆍ간결ㆍ맑은 글씨ㆍ예술적 조형미 주력 회화성 등 한국성 추구

취석은 광개토대왕비, 판본체, 궁체 등 한글서예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우산, 우창, 산민, 하석, 이당, 심석  등 강암서맥의  글씨와  추사, 창암, 갈물, 소전, 일중, 월정, 소암, 검여, 동정, 유당, 남정, 학남, 소지, 평보 등 근현대 작가들에게 다가가게 됐다.

취석은 한국서예의 우수성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한국적 아름다움과 느낌을 중시하는 한국성을 추구하게 됐다.

사치스러운 화려함보다는 담백하고 간결하고  맑은  느낌의  글씨와  지나친  추상성을  경계하면서  예술적조형미에  주력하는 회화성을 추구하게 됐다.

취석은 세계의 수많은 문자가 모두 서예의 소재가 돼야 하며 그 중에서도 한글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옛것을 뿌리로 삼는 법고를 위해 한자 한문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모국어인 한글이 주를 이루는 서예를 통해 우리 서예의 고유성, 대중성, 한국성, 보편성으로 서예의 정체성이 확립되기를 소망했다.

또한 우리의 어순에 맞게, 서예의 글쓰기 순서가 오늘날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가 아니라 왼쪽에서 오른쪽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현대 글쓰기 차원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했다.

◆취석의 서예 정의 ... 아름다움, 추상적 형상, 순간적 일회성 운필, 법고창신, 인문학적 가치 표출 등

취석의 이런 고민은 많은 예술 장르 가운데서 정신적 가치가 가장 높다고 믿어온 서예가 현대에 와서 그 가치에 비해 소홀히 여겨지는 데 대한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취석은 완전히 망라적일 수는 없지만 서예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서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문자예술이다▷서예는 추상적 형상의 문자예술이다▷서예는 순간적 일회적 운필의 문자예술이다▷서예는 시간적 흐름 속에 계승되는 법고창신의 문자예술이다 ▷서예는 인문적 가치와 의미를 표출하는 문자예술이다.

그러면서 기본적으로 서예란 하얀 종이에 검은 먹으로 글씨를 쓰고 빨간 도장을 찍는 흑백주의 조화라고 했다.

서예가 진정한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기간의 법고과정을 겪어야 진정한 필력이 생겨나고, 그 필력에 의해서 생각에 따라 자유자재로 어떤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했다.

여기에 인문적 식견이 더하면 좀 더 의미와 가치가 높은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서예는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고 거침없이 솔직하고 아름답게 따뜻한 생각을 세상에 풀어 놓는 일이라고 했다.

◆취석 프로필

취석은 1959년 김제종정초등학교, 1965년 익산남성중학교, 1968년 전주고등학교, 1972년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 1973년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해 교육과정을 마쳤다.

1979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한국예술행정에 관한 연구로 행정학석사, 1985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책실패의 제도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수득했다.

1980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행정공무원으로 24년간 봉직하다 명예퇴직하고 2005년 정계에 입문해 전주시장 8년, 전북도지사 8년, 지역과 국가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2022년 6월말 정계에서 은퇴하고 젊은 시절의 꿈을따라 서예와 시문학에 전념하고 있으며,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장과 서울 시인협회 고문, 전주와 전북 문인협회, 시인협회, 강암연묵회 등에 참여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젊어서부터 붓을 놓지 않고 4000여 점의 비교적 많은 작품을 세상에  남겼고, <얼굴  없는  천사비>,  <애국지사장현식선생기적비>,  <한옥마을 풍낙헌>,  <부안내변산월명암>,  <세계평화명상센터대웅보전> 등 상당수의  현판과 비문, 제호 등을 남겼다.

정책학 전공서인 '정책성공과 실패의 대위법'을 스승이신 김영평 교수와 공동으로 저술했고, 정치관련 대담집으로 '송하진이 꿈꾸는 화이부동 세상'이 있다.

시집으로 '모악에 머물다'와 '느티나무는 힘이 세다'가 있다. 서예작품집으로 '거침없이 쓴다, 푸른돌 취석 송하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