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푸른돌·취석(翠石) 송하진 서예초대전 '거침없이 쓴다'

2024-09-11     투데이안

-송하진 전 전북도지사, 거침없이 쓰는 서예로, 화이부동(和而不同) 천진(天眞)의 세계를 펼치다
-흔들리는 한국서예가 가야 할 새로운 변화의 길 제시
-한국미술관(서울)서, 9월 25일부터 10월 1일까지
-현대미술관(전주)서, 10월 11일부터 11월 10일까지 

[투데이안] 푸른돌·취석 송하진의 '거침없이 쓴다' 초대전이 서울과 전주에서 각각 열린다. 취석(翠石)은 한글로 푸른돌을 뜻한다.

서울 인사동 한국미술관에서는 오는 9월 25일부터 10월 1일까지, 전주 현대미술관에서는  10월 11일부터 11월 10일까지 취석의 삶이 담긴 작품을 감상할수 있다.

그는 서예의 대중성과 한국성 그리고 세계성을 고민해오면서 새로운 소재와 장법(章法), 결구(結構)로 독특한 형상성과 조형성을 끊임없이 추구해왔다.

또한 근ㆍ현대 한국의 대표적 서예가 중의 한 사람인 강암 송성용 선생의 막내 아들이기도 하다.

현재 세계 서예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이번 초대전에서 서예가를 특별히 초대해 서예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변화와 활력화를 도모할 계획이다./편집자 주
 

◆유연하고 진실된 정치행정가 민선 시장(2선)과 도지사(2선)의 삶 ... 유년기ㆍ청소년기 서예 속에서 

평소 정치와 행정은 붓글씨를 쓰듯 유연하게, 그리고 시를 쓰듯 진실하게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전문서예가가 아니라 거의 평생을 정치행정가로 직업공무원과 민선 시장(2선)과 도지사(2선)로 살아왔다.

그런 그가 한국서예의 중흥을 기원하면서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초대전을 열 계획이어서 크게 주목 받고 있다.

그러나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간 서예가로서도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취석 송하진은 이미 서예계에서도 제법 알려진 인물이다.

취석은 유소년기와 청년기 등 성장하는 내내 거의 매일 같이 서예와 한문을 보고 들으며 자랐다.

생활 속에서 서예가 자연스럽게 '눈에 젖고 귀에 물들어온' 소위 몸에 밴 목유이염(目濡耳染)의 저력을 가진 서예가로 통한다.

취석의 조부 유재 송기면(裕齋 宋基冕) 선생은 서예가이자 '우리의 전통을 몸체로 삼되 그 쓰임새는 새로워야 한다'는 구체신용설을 주장한 큰 유학자였다.

그의 부친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 선생은  근현대  한국서예를  대표하는  대가  중의  대가였다.

오늘날 서단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우산 송하경, 하석 박원규, 산민 이용, 이당 송현숙, 심석 김병기 씨 등도 강암 선생의 제자들이다.

취석이 그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면서 우리나라 최대 서예행사인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조직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를 1997년에 직접 기획했는가 하면 한글서예의 유네스코인류무형문화유산 지정운동에 앞장서는 것도 이런 연유다.

◆서예 사랑꾼 취석 ... 누구보다 서예의 나가야 할 방향 잘알아

취석은 누구보다도 서예사랑꾼이다.

서예를 서예계 안에서만 바라보기보다는 서예계 밖에서 대중과 함께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서예의 위상은 어떠하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취석은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서예는 지금 아픔을 겪으며 흔들리고 있다고 보고 있다.

아파하고 흔들린다는 것은 서예가 결코 침체하거나 위기라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서예술로 발전해가는 몸살을 앓고 있다는 의미다.

현대는  삶의  방식이  급속히 서구화  현대화 되고  빅데이터에  힘입은  인공지능 등 초지능 초연결 시대이며, 한자와 한문보다는 한글과 영어의 사용 빈도가 커진 시대다.

여기에 건축 등 물적 시설의 소재나 규모도 크게 변화해 서예 또한 변하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 됐다.

따라서 서예소재로서 한자, 영어, 한글 등 수많은 문자의  가치와 기능에  대한 재인식, 현대건축물과 서예작품과의  조화, 타 예술장르와의 상호소통교감, 멀어져가는 젊은층의 서예관심도 제고, 서예학과의 폐지  등에  따른  초ㆍ중ㆍ고ㆍ대학 등 서예교육의  공적제도확립  등 그야말로  서예는 큰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는 것이다.

◆서예가 나가야 할 새로운 길 네가지 제시

취석은 이런 시대적 환경 속에서 서예가 나가야 할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첫째 '거침없이 쓰는 서예'다.

거침없이 쓰는 서예란 과거의 법칙, 방식, 형식, 틀 등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고 쓰는 서예를 의미한다.

또한 서예가 추구하는 아름다움(美)의 개념을 '곱고 예쁘고 정돈된 글씨'를 뛰어넘어 '거칠고 흩날리고 자유분방한 글씨' 등 그 개념을 무제한 확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작품의 구성과 배치 등 장법 결구도 더 자유로워야 한다고 보고 있다.

물론 이미 이러한 움직임이 일부 젊은 서예가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기 때문에 미래는 밝다고 본다.

둘째, 한글이 주인 되는 서예, 이것이 K-서예의 지름길이다.

서예 하면 한자와 한문을 위주로 배우고 작품도 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현실을 변화시켜 세계의 수많은 문자를 모두 자유롭게 소재로 하되 우리 한글이 주인 되는 서예를 하자고 제안한다.

1443년 세종대왕이 한문 대신 우리글 한글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이후 한글의 역사도 600년이 되어가고 세계적으로도 가장 과학적이고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글씨로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이제  우리  한글이 당연히 서예의 주인이 될 때가 된 것이다.

취석은 정치행정가로서 삶의 현장에서 대중들이  현판이나  간판, 서예작품을  접할  때마다  어려운  한자와  문장의  어순과 필순(筆順)의 반대 현상, 그리고 서체의 어려움 때문에 난감해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기 때문에 한글이 주인되는 서예로의 변화 필요성을 크게 느껴왔다.

취석은  한국, 중국, 일본은  같은 한자문화권이기  때문에 서예를  하는 사람끼리의 서예계  내부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일반대중들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여기서 중국은  한자가 주인되는  중국서예로, 일본은 일본어가 주인되는 일본서예로, 한국은 한글이 주인되는 한국서예로 발전되어야 국적이 분명한 서예술의 다양성이 이뤄지고 그 다양성을 바탕으로 진정한 서예의 세계화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기대하는 K-서예의 지름길인 것이다.

한글만으로도 서예가 충분히 예술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국서예가 대중성과 한국성 그리고 진정한 세계성을 확보할 것이라고 했다.

셋째,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필순이다.

서예작품에 있어, 문장의 어순(語順)은 왼쪽에서 오른쪽을 향하고 있으나 글씨를 쓰는 필순(筆順)은 그 반대로 대부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는 것이 인습적 관행이 됐다.

특히 오늘날 한글의 어순과 필순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다.

따라서  취석은  서예작품의  경우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오른쪽 서예를 해야 혼란을 막을 수 있고 특히 젊은 층의 호응도를 높일 수 있다고 했다.

넷째, 한국적 느낌과 맛, 그리고 분위기가 우러나와야 한다.

취석은 광개토대왕비나 한글궁체처럼 서예작품에서 한국적 느낌과 맛, 그리고 분위기가 우러나와야 한국성이 있는 진정한 한국서예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중국서예나 일본서예와 확연히 다른 한국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앞으로 끊임없는 탐색과 논쟁이 필요하다고 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에 기록된 화이불치검이불루(華而不侈儉而不陋: 아름답지만  사치스럽지  않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와 같은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했다.

서예가이자 평론가인 심석 김병기 교수는 “손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 자체가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  앞에서  누구라도  과감히  나서서  ‘거침없이  쓰는  서예의  즐거움’을 알려야 서예가 산다는 절박한 생각을 했기에 용기내어 자신의 서예를 들고 나온 것" 이라며 "취석이 들고나온 거침없이 쓰는 서예는 한국서예가 구현해야 할 시대정신이고, 한국의 서예를 진흥하는 하나의 유력한 대안이며,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전통서예를 알리는 효과적인 묘안이라고 할 수 있다.”고 평했다.

미술평론가인  한국미술비평연구소  장준석  대표는 “한학을  비롯해 서예이론에 정통한 취석은 다양한 서체를 연구하면서 특히 ‘한국성’에 큰 관심을 두고, 한국 서예의 활성화와  세계화 방안을  모색해왔다." 며 "그가 한국성을  지닌 한국서예의  창 출에 주목하게 된 것은 대중들이 서예를 접할 때마다 어려운 한자와 서체의 난해함 때문에  당황해하거나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면서부터였다.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가는 서예를 오늘의 현실에 맞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고 평했다.

푸른돌·취석 송하진은 거침없이 쓰는 서예를 주장하면서도 “서예란 문자를 소재로, 일회적  운필에  의한  추상적  형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행위로서  시간의 흐름속에 계승되며 인문적 의미를 표출하는 문자예술”이라고 정의했다.

서예의 기본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먹으로  글씨를  쓰고  붉은  도장을 찍는 흑백주(黑白朱)의 조화로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상당기간의 법고(法古) 즉, 수련과정을 거쳐 필력을 길러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취석 역시 여느 서예가와 마찬가지로 50대 후반까지는 구양순, 안진경, 동기창, 황산곡, 하소기, 왕탁, 우우임 등 주로 중국서예를 보고 듣고 공부했다.

그러나 60대가 되면서 서예의 대중성과 한국성, 그리고 세계성을 고민하면서 추사, 창암, 원교, 소전, 강암, 일중, 남정, 평보를 비롯해 현대 한국서예가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예술적인 면에서 한국서예는 빼어나고 무궁한 발전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주창하는 거침없이 쓰는 서예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푸른돌·취석 송하진은 이번 초대전과 작품집에서 거침없이 쓰는 서예, 한글이 주인되는 서예, 오른쪽 서예, 한국성을 추구하는 서예를 유감없이 선보이고 있다.

따라서 작품의 다양성과 대중성을 향한 노력 또한 크게 돋보이는 것이다.

미술평론가 장준석 대표는 「붓 하나로 화이부동 천진의 세계를 펼치다」라는 평론 
에서 “구수한 큰 맛 같으면서도 다양한 형태의 서체를 구사한 취석의 서예는 개성 있으면서도 특별한 면들을 내재하여, 특별한 형상미와 조형성을 맛볼 수 있게 한다"며 "자작시의 시상이 느껴지는, 담담하게 써 내려간 독창적이고도 유연한 서체에는 우리의  정서가  담겨  더욱  한국적이며  생동적이다. 정치와  행정가  이전에  한평생 서예와도 함께 살아온 그는 한국의 대표적 서예가로서 손색이 없다.”고 평했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는 취석의 작품은 ‘그림으로 쓰여’ 있기도 하고 ‘글로 그려져’ 있기도 하다.

글자지만 그림이 되어 있고, 시가 되어 있는 것이다.

중득심원(中得心源: 안으로  마음의  근원을  깨닫다)에서  발원된  절묘한  붓놀림에는 유연함, 맑음, 천진함이 함께하여, 마치 ‘무미(無味)의 미’ 같은 큰 맛과 구수함마저  있다.

‘한국성이  농후한  서예’,  ‘대중과  함께하는  서예’,  ‘한국인의  삶과 함께하는  서예’를 구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온 취석의  자세는  사회적  환경, 대중의  취향과  의식  등에서  드러나는  미적  조형성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이다. 

그가 평생 염원해 왔던 바처럼, 우리의 현대 서예는 시대가 변하는 것만큼 새로움을 모색하면서  발전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는  특히  한국성의  중요함이  간과되면 안된다.”고 평했다.

서예평론가 김병기 교수는 “취석의 거침없이 쓰는 서예는 정직이고 질박이다. ‘티’내지 않음이다. 법서(法書) 운운하며 티를 내는 유법(有法)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법(無法)인 것도 아니다. 취석의 글씨에는 목유이염(目濡耳染: 눈에 젖고 귀에 물든다)의 눈썰미로부터 자리  잡은 허술한  듯 탄탄한 기초가  있다. (중략) 취석의 서예작품을 들여다보면 취석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취석의 삶이 보인다.

취석의 청정심, 도량, 인정, 해학과 초탈이 신음(呻吟)으로 들어 있다. 그런데 그런 신음들이 그저 순수한 신음일 뿐 꾸밈이 없다.

마냥 평범한 사람의 신음일 뿐 학자연(學者然), 시인연, 예술가연하는 신음이 아니다. 시장연(市長然) 도지사연(道知事然)하는 신음은 더욱 아니다.

밝은 눈으로 현실을 보고, 맑은 마음으로 시문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현실의 문제를 서예로 풀어 보자는 의미의 진솔한 신음이다.

취석의 이러한  신음은  명나라  말기에  문단혁신을  주도한  공안파의  문예이론과도  상통한다.

(중략) 이 시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새로운  서예이자  서예혁신Movement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했다.

◆푸른돌·취석 송하진은 누구?

1952년 4월 29일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백산면 상정리 요교마을에서 서예가 강암 송성용(剛菴  宋成鏞)  선생과 농사짓는  이도남(李道男)  여사의  4남2녀 중  여섯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966년 김제에서 전주로 이거해 현재까지 살고 있다. 

어려서부터, 글을 쓰는 문학과 글씨를 쓰는 서예에 소질을 보여 장차 훌륭한 시인과 서예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이는 할아버지로부터 비롯되어 아버지와 형제들에 이르기까지 가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었다.

아버지 강암 선생은 일제시대 창씨개명과 단발령을 거부하는 뜻에서 평생을 상투틀고 갓 쓰고 우리 민족 고유의 하얀 한복을 입고 사셨다.

한문학과 서예5체, 사군자에 전념하여 현대적 감각의 예술정신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지조와 의리를 지키고 산 선비정신과 민족정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러한 강암의 정신은 할아버지 유재 송기면(裕齋 宋基冕) 선생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유재는 글씨보다는 문장이 더 뛰어났고, 문장보다는 행실이 더 뛰어나 사람들은 ‘필불여문(筆不如文) 문불여행(文不如行)’이라 칭송했다.

강암은  16세에  이도남  여사와 결혼했다.

장인이신  고재  이병은(顧齋 李炳殷) 선생은 심성은 책으로 육체는 농사로 길러야 한다는 신념으로 농사와 학문에 전념한 유학자로 역시 강암에게 영향을 줬다.

할아버지 유재는 청년기엔, 전북지역 서화에 선구적 영향을 미치고 서양철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한 학자로 알려진 석정 이정직(石亭 李定稷)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중년기엔  3000명 이상의  제자를  키워내고  100권 이상의  저서를  펴내며 조선시대 유학을 마지막으로 꽃 피운 인물로 알려진 간재 전우(艮齋 田愚) 선생의 제자가 됐다.

따라서 유재가문은 자손과 혼맥을 통해 학문과 서화에 능한 사람이 많았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취석 또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글 잘 짓고 글씨 잘 쓰는 사람이 되겠다는 어렸을 때의 꿈과 달리 취석은 법학과 행정학을 전공하게 됐다.

행정고시를 통해 행정가의 길을 걷다가 정치의 길에 들어서 전주시장과 전라북도지사로 16년간 봉직했다.

전통적 분위기의 가문에서 자라고 현대적 교육을 받은 취석의 학문적 소양과 예술적 기질은 정책을 구상하고 집행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세계적 명소가 된 전주  한옥마을을  가꾸고  유네스코음식창의도시와  국제슬로시티로  부각시켰다. 

홀로그램산업, 전라감영복원, 문화관광재단  설립, 전북문학관과  국악원, 세계서예 전북비엔날레의 중흥은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취석의  서예는  당연히  아버지  강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예·해·행·초서의 5체와 사군자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다양성을 중시했다.

50대 중반까지는 여느  서예가와  마찬가지로  구양순, 안진경, 동기창, 황산곡, 왕탁, 우우임 등 중국서예가들의 비첩을 주로 공부했다.

그러나 정치의 길에 들어서면서 서예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게 됐다.

정치과정은 시민과 도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바 대중들이 서예를 접할 때마다 잘 알지 못하는 한자 한문과 어순 때문에 매우 당황해하고 부끄럽게까지 느끼는 모습을 보게  됐다.

그래서 서예도 일반시민이 쉽게 접근하여 즐기는 예술이 될 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광개토대왕비, 판본체, 궁체 등 한글서예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우산, 우창, 산민, 하석, 이당, 심석  등 강암서맥의  글씨와  추사, 창암, 갈물, 소전, 일중, 월정, 소암, 검여, 동정, 유당, 남정, 학남, 소지, 평보 등 근현대 작가들에게 다가가게 됐다.

취석은 한국서예의 우수성과 가능성을 발견하고 한국적 아름다움과 느낌을 중시하는 한국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사치스러운 화려함보다는 담백하고 간결하고  맑은  느낌의  글씨와  지나친  추상성을  경계하면서  예술적조형미에  주력하는 회화성을 추구하게 됐다.

취석은 세계의 수많은 문자가 모두 서예의 소재가 돼야 하며 그 중에서도 한글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옛것을 뿌리로 삼는 법고를 위해 한자 한문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모국어인 한글이 주를 이루는 서예를 통해 우리 서예의 고유성, 대중성, 한국성, 보편성으로 서예의 정체성이 확립되기를 소망했다.

또한 우리의 어순에 맞게, 서예의 글쓰기 순서가 오늘날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가 아니라 왼쪽에서 오른쪽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현대 글쓰기 차원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했다.

취석의 이런 고민은 많은 예술 장르 가운데서 정신적 가치가 가장 높다고 믿어온 서예가 현대에 와서 그 가치에 비해 소홀히 여겨지는 데 대한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취석은 완전히 망라적일 수는 없지만 서예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서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문자예술이다▷서예는 추상적 형상의 문자예술이다▷서예는 순간적 일회적 운필의 문자예술이다▷서예는 시간적 흐름 속에 계승되는 법고창신의 문자예술이다 ▷서예는 인문적 가치와 의미를 표출하는 문자예술이다.

그러면서 기본적으로 서예란 하얀 종이에 검은 먹으로 글씨를 쓰고 빨간 도장을 찍는 흑백주의 조화라고 했다.

서예가 진정한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기간의 법고과정을 겪어야 진정한 필력이 생겨나고, 그 필력에 의해서 생각에 따라 자유자재로 어떤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했다.

여기에 인문적 식견이 더하면 좀 더 의미와 가치가 높은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서예는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고 거침없이 솔직하고 아름답게 따뜻한 생각을 세상에 풀어 놓는 일이라고 했다.

취석은 1959년 김제종정초등학교, 1965년 익산남성중학교, 1968년 전주고등학교, 1972년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 1973년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해 교육과정을 마쳤다.

1979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한국예술행정에 관한 연구로 행정학석사, 1985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책실패의 제도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수득했다.

1980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행정공무원으로 24년간 봉직하다 명예퇴직하고 2005년 정계에 입문해 전주시장 8년, 전북도지사 8년, 지역과 국가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2022년 6월말 정계에서 은퇴하고 젊은 시절의 꿈을따라 서예와 시문학에 전념하고 있으며,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조직위원장과 서울 시인협회 고문, 전주와 전북 문인협회, 시인협회, 강암연묵회 등에 참여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젊어서부터 붓을 놓지 않고 4000여 점의 비교적 많은 작품을 세상에  남겼고, <얼굴  없는  천사비>,  <애국지사장현식선생기적비>,  <한옥마을 풍낙헌>,  <부안내변산월명암>,  <세계평화명상센터대웅보전> 등 상당수의  현판과 비문, 제호 등을 남겼다.

정책학 전공서인 '정책성공과 실패의 대위법'을 스승이신 김영평 교수와 공동으로 저술했고, 정치관련 대담집으로 '송하진이 꿈꾸는 화이부동 세상'이 있다.

시집으로 '모악에 머물다'와 '느티나무는 힘이 세다'가 있다. 서예작품집으로 '거침없이 쓴다, 푸른돌 취석 송하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