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을 우리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인 멜로에 대한 유감

2009-10-23     투데이안
조 현 철 <군산대학교 교양교직과 교수>

물리적 활력과 장관의 블록버스터의 계절이 가고, 스산한 가을 바람과 함께 우리의 정서성에 호소하는 작고 진한 영화들이 스크린을 누비고 있다. 만고의 테마인 ‘남여상렬지사’에 집중하는 습성은 여전하지만, 그러한 멜로적 톤을 유지하고 완성해 내는 데 있어 제시되고 있는 작품들은 서로 다르면서도 같다. 그 스타일과 완성도는 저마다 다른 반면, 모두 현실에 대한 정면응시보다는 사랑현상에 대한 판타지로 일관한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의하기도 하다.

『불꽃처럼 나비처럼』: 불꽃처럼 화사하나, 나비처럼 가볍게 역사를 농단하는 그 게으른 상상력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멜로는 퍽이나 생뚱맞다. 어린 나이에 미천한 사가에서 발탁되어 지존의 옆자리에 오른 후, 시아버지와의 권력 다툼과 개화기 어지러운 외세의 각축전 속에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일에도 바빴을 빼어나게 정치적인 인물인 ‘명성황후’가 그 장본인인 탓이다. 황후와 무사간의 사랑을 영화적으로라도 이어나가기에는, 지존과 미천 간의 그 까마득한 신분적 간극을 어린 시절 아득한 인연만을 매개로 좁힐 수 있다고 하는 설정 자체가, 미흡하고도 남는다. 더욱이 영화는 이 두 사람의 사랑이 보다 활발히 작동되도록 하기 위하여,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에 개입하여 그 원형을 태가 나게 훼손시켜버리는 무리를 감행하고야 만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왜곡의 현장은, 어김없이 생경한 컴퓨터그래픽의 장비로 그 배경이 묘사되고 게임 아바타적 인물들의 과장된 활동으로 채워져 버린다. 그리하여 영화는 간간이 불꽃처럼 화사해지나, 나비처럼 가볍게 역사와 인물을 일관되게 농단하게 된다. 마침내 영화는 밀도있고 치열하여야 할 이 연인간 사랑이 그 본질적인 허구성의 노출로 인해 차라리 희화의 대상으로 전락해버리도록 하는 실패를 초래하고야 만다. 그리고 이러한 멜로 강압의 의지가 작위적 판타지를 만남에 따라 빚어지는 실패는, 명성황후의 시해사건현장에 그녀의 연인이며 수호신인 무사가 중요하게 등장하면서, 이 영화의 우스꽝스럽고 ‘장대한’ 클라이맥스와 함께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참으로 게으른 상상력과 장르의 견고한 관습이 대자본의 지지를 득했을 때의 참사가 어떤 모습을 띠게 되는지를 생생히 경험하는 순간을, 관객은 만나게 된다.

『내사랑 내곁에』: 사랑에 대한 또 하나의 판타지


『불꽃처럼 나비처럼』이 한없이 기벼워진 멜로라면, 『내사랑 내곁에』는 묵직한 느낌을 전하는 기획으로 탄생하였다. 루게릭병이라는, 감각은 여전한데 극심해지는 사지와 근육의 마비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 끔찍한 재앙의 희생자가 삶의 마지막에 불태우는 사랑의 수혜자가 된다는 설정만으로도, 영화는 벌써부터 사랑에 대한 엄숙한 접근을 관객에게 사전 주문한 상태를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진지성을, 무려 20kg이상을 감량하여 이 처절한 주인공의 내면을 앙상한 육체로 외면화한 주연 배우(‘김명민’)의 남다른 연기결단이 보증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이런 시위에 가까운 육체언어는 그 어떤 연기의 기교가 주는 감흥보다 위력적으로 관객의 심성을 자극한다. 그런데 그렇게 유발된 전율이, 영화중반의 대사처럼 『다 불질러버리는 사랑』의 밀도와 격렬함에의 공감으로 결코 이끌지지는 않고 있다. 차분한 연출과 성실한 연기 그리고 절제있는 대사 등 영화 내적 요소들의 비교적 균질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전체적으로 어딘가 구면인데 다시 만날 일이 없는 타인처럼 느껴진다. 그러한 생경함은, 절대적인 궁지에 몰린 한 남성에 대해 별다른 계기 없이 (사랑이란 것이 다 그런 것이라고는 하지만) 연애감정으로 몰입하는 한 어여쁜 여성의 영혼이 차라리 구도자의 그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상황설정에 기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있을 법하지 않을 이러한 형태의 ‘내사랑 내곁에’는, 사랑에 대한 또 하나의 판타지를 생성하는 업적을 이룩하는 지점에서 멈추고 있다.

『호우시절』: 잠재적 연인들에게 내릴 ‘호우'


‘허진호'감독의 최근작 『호우시절』은, 사랑에 대한 그 표현주의적 숨결을 가습기에서 뻗어나오는 수증기처럼 아련하고 부드럽게 내뿜고 있다. 물론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그림엽서이다. 중국 ’청두‘라는 이국적인 공간 속에서 미국 유학 중 동기생이라는 경력을 공유하는 선남선녀가 어제의 추억을 종잣돈 삼아 오늘의 유혹을 미래의 사랑의 형태로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을 담는 과정에서, 영화는 그저 예쁘게 진행되어야 했다. 아직 충분히 짙푸러지지 못한 청두 두보초당 내 수목의 연한 연두색의 질감이 미래의 완성을 예감하는 오늘의 기대 섞인 미완을 상징하는 사이, 모국어를 버린 두 남녀는 그 의사소통의 방식보다도 더 모호하고 혼란스러워진 탐색과 유혹, 제안 그리고 결단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리고 그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사랑의 진행은 특별한 신파나 극단화에의 강박없이 그저 수수히 전개된다. 그리하여 영화는 세련된 시공간적인 표현과 매력적인 인물들의 멋들어진 제시를 포함하는 스타일리쉬 멜로드라마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그런데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가 표현하였던 사랑과 인생의 인상과 깊이를 기억하는 ‘허진호'의 팬들에게는, 이러한 평면화된 사랑보고서는 주문생산에 준하는 소비자의 만족을 얻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좋은 때 내리는 비'라는 의미의 『호우시절』의 관람이, 많은 잠재적, 현재형의 연인들에게 그 ‘호우'로 작용하기에는 충분한 판타지가 되는 것만은 틀림 없다./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