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칼럼] 오펜하이머

2023-09-07     엄범희 기자

-인류의 끔찍한 형벌을 수반한, 20세기 프로메테우스의 모순

조현철 군산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직과 교수

[투데이안] E=mc²: 물체의 질량이 큰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 한다. 우라늄과 플루토늄 등의 방사능 물질은 스스로 질량을 잃으며 에너지를 방출한다.

특정한 질량값의 우라늄과 플루토늄은 중성자를 흡수해서 원자핵이 분열하면, 중성자와 에너지를 방출한다.

이 핵분열로 인해 방출된 중성자는 주변의 다른 동종 방사능 물질들을 때리게 되는데, 이에 따른 연쇄 분열은 엄청난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전에 주로 뛰어난 독일의 물리학자들이 이론적으로 밝혀낸 이 사실은, 가공할 위력을 가진 폭탄의 가능성을 예견하게 했었다.

이에 따라 2차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 동안 핵무기 개발의 과제는, 추축국과 연합국 간의 사활을 건 치열한 경쟁의 내용이 되어 있었다.

특히 뒤늦게 연합국으로 참전한 미국은 이 과제를 ‘맨하탄 프로젝트’라 이름 붙이고, 은밀하고도 전면적인 밀도로 추진하고 있었다.

존 로버트 오펜하이머(‘오피’)는 피카소를 거실에서 감상할 정도의 부유한 환경 속에서, T. S. 엘리엇을 읽고 스트라빈스키를 들으며, ‘현대의 정신’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하버드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로 유학했다가 다시 독일 괴팅겐 대학에서 이론 물리학을 공부했고, 특히 스펙트럼 양자론을 전공하고 미국으로 돌아와, 아직 20대의 나이에 UC 버클리와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교수직을 수행했다.

당시 최첨단 과학의 세례를 받고 천재적 역량으로 주의의 대상이었던 오피에게, 맨하탄 프로젝트의 핵심 업무가 주어진다.

이것은 거대한 공장 규모의 실험실과 많은 노동력의 운용을 통해 추출된 핵분열 물질을 가지고, 프랑켄쉬타인 급의 폭탄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국방부 소속 책임자인 그루브스 대령의 지휘를 받아, 뉴멕시코의 사막에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를 세우고, 미 전역에서 최고의 물리학자들과 화학자들을 모집해, 그들에게 극도로 세밀한 과정을 무모하게 반복해가는 작업을 요구했다.

핵분열 물질들이 순간적으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임계질량을 알아내어야 했고, 이를 위해 최고수준 난도의 이론과 실험을 총동원해야 했다.

예상치 않은 조기 폭발이나 방사능 대량 유출의 치명적 위험을 상시 느껴가면서 말이다.

영화 '오펜하이머'는, 제목이 단순 시사하듯이 20세기 역사의 최대 폭발력을 가진 사건(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의 물리∙공학적 과정을 수행한 인물의 업적을 소개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야심을 드러낸다.

일단 영화는 모순으로 가득한 한 인물의 입체성을 전시하는 내용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그런데 이 내용을 따라, 좁게는 ‘냉전 체제’의 두터운 커튼을 내려가며 세기의 중반을 보내던 신흥 슈퍼파우어 국가(미국)의 사회적 혼란이 지적되고, 거시적으로는 개념과 기술의 조합이 일궈낸 빛나는 성취가 결국 인류 공멸의 위협을 가져올 것이라는 아이러니가 격렬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를 위해 영화는 두 청문회 진행의 중계라는 형식으로 3시간의 러닝타임을 채운다.

하나는 ‘오피’의 보안 인가 유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트라우스’ 원자력 위원회장의 장관 임용을 위한 것이다.

후자의 주인공(스트라우스)이 주도한 전자의 과정에서 오피의 사회적 추락이 이루어지고, 또한 전자의 과정(오피 청문회)에 대한 개입으로 인해 후자 주인공의 좌절이 귀결되는 구성으로, 영화는 극적 긴장과 흥미를 배가할 수 있었다.

청문회들을 통해 소개되는 오피가 지닌 인성의 불균질성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캐임브리지 유학 시절 지도교수 방의 사과에 시안화칼륨을 발라두었는데, 존경의 대상으로부터 충분한 인정과 지지를 받지 못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국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첨단 물리학을 전하는 오피 교수의 모습은, 열정과 친절의 그것이었다.

동생과 애인 및 아내 등 공산주의 활동가들을 주변에 두었고 스페인 내전의 공산당에 지원금을 보내었으나, 본인은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고 과학자노조 차원에서의 실천 활동에도 적극 나서지 않았다.

개성 충만의 연구원들 간 협업을 최적으로 끌어내는 조율사적 역량을 십분 발휘하면서도, 의견 대립 시 탁월함이 부족하다 의심되는 당사자에게는 가혹할 정도의 공개적 모욕 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여느 사람과 다름없이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우지만, 자신 만의 보다 중요하고 고귀한 활동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린 아이들의 양육을 조금 더 평범한 역량을 가진 동료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아내에 대한 애정과 의존성을 남다르게 유지하면서도, 그는 결혼 전 열정의 대상이었던 여인을 찾아 밤을 보내기도 했다.

사실 영화가 후반에 주목하는 것은 오피의 또다른 보다 더 큰 의미의 ‘불균질성’이다. 적국의 땅에 적용된 핵무기 폭발의 성공을 이룬 후, 한 자리에 모여 열광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외쳤다.

‘일본은 혼이 좀 났겠네요.’ ‘독일에 쏘지 못해 유감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을 단절시키는 것은, 그의 귀를 다르게 장악하는 압도적인 크기의 집단적 발자국 쿵쿵 소리였다.

그의 눈에 포착되었던 청중의 환희의 표정과 열광의 몸짓은, 뜨겁게 허물어 내리는 인간의 피부로 이내 대치되고 만다.

원자폭탄의 일본 투하 후 승전의 주역으로 국민적 환호를 받는 와중에 백악관에서, 그는 대통령 트루만으로부터 전쟁 종식과 미군 희생 감소의 공로를 치하하는 언급을 접한다.

이어 제시된 보다 강력한 수소폭탄 프로젝트 임무에의 참여 권유에 대해, 그가 한 말은, ‘제 손이 피로 물들어져 았는 기분입니다’였다.

이에 ‘앞으로는 징징대는 어린애를 들이지 말라’는 대통령의 소리를 뒤통수에 달고, 그는 오벌 오피스를 나선다.

영화는 또한 종전 후 세계 패권을 노리고 진행된 미-소 냉전의 구축과정에서 미국 사회가 겪던 혼란을 진단하고 있었다.

매카시슴의 준동으로 자유주의 체제 내에서, 특정한 신념을 가진 것으로 의심되는 ‘사회적 자원들’이 현업에서 축출되도록 하는 광풍이 불었던 시절이 있었다.

오피의 청문회와 이를 통한 그의 ‘공적 퇴출’은, 바로 이런 시대적 한계를 반영히는 것이었음을 '오펜하이머'는 새삼 상기시키고 있었다.

이는 종전 후 새롭게 부상한 강적인 소련 공산체제와의 경쟁으로 인해, 정치권에서 제기되었던 보다 강력한 핵무기 개발의 요구에 대해, 오피가 견지했던 ‘반동적’ 태도에 대한 반공주의 보수 세력의 응징이었던 것이다.

엔딩은 오피가 프린스턴의 교정에서 아인쉬타인과 나눈 대화로 구성된다. 이 자리에서 이 모든 치명적 결과의 원인을 제공한 원천 지식의 창출자로서, 아인쉬타인의 예언자적 언급은 주제를 오롯이 전하고 있다.

원자 분열로 인한 가공할 위력의 에너지에 대한 수학적 계산식을 받아든 아인쉬타인이 먼저 예측한 일차적인 결과는, 과학자들에게 돌려지는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는 빠르게 덧붙인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 될 것이라고! 그가 스스로 대통령에게 대표 청원한 내용대로, 이 탁월한 물리학적 업적의 결과는 연합국의 승리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일시적 성취는, 다시 냉전체제라는 적대적 경쟁 관계의 맥락 속에서는 또 다른 파멸적 성취로의 견인을 이루어낼 뿐이었다.

핵분열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제조되는 원자폭탄의 폭발력으로, 이제는 핵 융합의 과정이 가능해지고, 이는 히로시마의 ‘리틀 베이비’를 난장이로 만드는 ‘자이언트 밤’(수소폭탄)의 상대적인 다량 보유를 위한 무한 경쟁의 악순환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마치, 인류의 편익을 위해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가 지속적으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게 되는 형벌을 겪어내어야 하듯이, 호기심 가득했던 천재 과학자들의 이 담대한 학문적 모험이 결국 끔찍한 인류의 형벌 수행을 수반하게 되었던 것이다.

모자를 챙기며 돌아가는 세기의 석학을 돌아 세우며 오피는 ‘공범 의식’을 요구하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렇게 인류를 위협하는 파괴의 연쇄반응을 이미 시작하게 되었다고. 이렇게 말하는 오피의 표정은, 차라리 처연한 것이었다. 원작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American Prometheus, 2006)”이다./조현철 군산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직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