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칼럼] '밀수'

2023-08-04     엄범희 기자

-비선형적 이야기의 확장성으로 관객의 기대를 경쾌하게 배반하는 오락물

조현철 군산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직과 교수

[투데이안] 1970년대, 라듸오와 바셀린. 시계와 담배 그리고 위스키 등 많은 생활용품을 쓸 만한 수준으로 얻으려면 모두 외제를 찾아야 했다.

수출 주도의 경제를 통해 외화 벌이에 집중하던 정부 정책은 근검 절약과 저축 정신으로 무장한 ‘건전한 소비자’를 정상 국민으로 부축이고 있었다.

막대한 관세를 피해 이 진귀한 물품들이 비교적 저렴한 가격표를 달고 서민의 절실한 욕구와 중산층의 과소비 욕망을 우아하게 충족시키던 방식은, 바로 아무곳 어디서나 있었던 암시장이었다.

이 어두운 통로의 우리 땅 초입 부분 중 하나가 ‘군천’이라는 항구도시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산업폐수로 오염된 물고기 대신, 육중한 사각의 정체불명 박스들을 건져 올리는 여자들이 있었다.

이렇게 『밀수』는 일단 어려웠던 시절 불우한 처지에 놓였던 그녀들의 인생애환과 소소한 갈등을 다루며, 지나간 시절에 대한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대물에 머무를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춘자와 진숙은 아버지의 배를 타고 생선 대신 박스를 낚는 ‘물질’을 통해, 짭잘한 재미를 보았다.

범죄행위의 발각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해하며 마지막 밀수 작업을 수행 중 세관 단속에 포착되고, 진숙은 그 와중에 아버지와 오빠를 사고로 잃고 모든 동료들과 함께 옥살이를 겪는다.

다만, 쥐도 새도 모르게 현장을 빠져나간 춘자를 밀고자로 스스로 지목하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근근히 물질을 수행해나간다.

그리고 수년 후, 이글거리는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는 진숙 앞에, 살랑거리는 태도로 나타난 춘자는 당돌한 제안을 해온다.

이번엔 보다 더 큰 규모로 이 탐나는 물질을 감행하자고, 부산파 전국구인 밀수조직과의 연합으로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이제 『밀수』는 조폭과 해녀 그리고 세관당국 간의 쫓고 쫓기는 범죄 스릴러물이 될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간교한 춘자의 술책으로 진숙과 해녀들의 은밀한 ‘물질’들이 재개됐다.

그러다가 새로운 배급로를 통해 급기야 무려 3억원 어치의 다이아를 건져 올리는 상황이 되자, 이 사업에 관계된 ‘눈 있는 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순수하게 배타적인 욕망에 복종하며, 각자 상대에 대한 서바이벌 게임에 돌입한다.

자 이제, 패자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는 물살을 가르며 최후에 부상하는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그렇게, 이제 『밀수』는 통렬한 액션 어드벤처 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특히 다수의 남녀가 잠수복을 입고 상대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감행하는 수중 액션 씬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종류의 역동성을 자랑하는 미장센으로 관객의 주의를 끌고 있었다.

이렇게 『밀수』는 재미있다.

영화의 분위기는 하나의 톤으로 재단되어 있기를 거부하고, 여러 색깔 옷을 갈아입어가며 관객의 기대를 기분 좋게 배반한다.

덕분에 이야기는 경쾌한 확장성을 유지하며, 절정과 종결로 향하는 밀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각 인물 행동과 여러 상황의 전개는, 많은 경우 미리 설계된 스토리라인에 부합하게 되도록, 성기게 연결되는 이음새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상상 가능한 가장 음험한 의도를 실행하는 악당이 등장하고, 이 엉뚱한 과정을 통해 희생된 여러 목숨들을 물 아래로 두고, 결국 전리품을 손에 쥐는 승자들은 가장 천진한 웃음으로 환희를 표현한다,

영화는 이들의 기쁨을 응원하고, 관객은 일단은 무언지 모르는 통쾌함을 안고 극장을 나서게 된다. /조현철 군산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교직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