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살인사건

2009-09-24     투데이안

『이태원 살인사건』

: 인간사 속 모호함과 답답함을 증언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그 묘한 긴장


조 현철 (군산대 교양교직과 교수-투데이안 객원 논설위원)

“이태원 살인사건”! 장편 상업영화로서 이보다 더 건조한 제목이 있을까?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그 장소는 이태원이라고만 영화가 미리 선언하고서, 관객을 적극적으로 극장으로 유인해야만 하는 한 편의 상업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 수 있을까?


언뜻 관객을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겠다 하는 대중조작의 욕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이 영화는, 사실 사건과 그에 관련한 진행과정을 그저 있는 그대로 지긋한 태도로 직시하고자 하는 단단한 결의를 깊숙이 품고 있다.

영화가 들여다보고자 하는 그 문제의 대상은, 다름 아닌 팩트를 가치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우리 사법체계의 본질적인 한계로 설정되어 있고, 그러한 한계를 목도해야 하는 관객은 새롭게 상기되는 모호함과 답답함으로 인해 꽤나 괴로워하게 될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뻔한 구성과 게으른 문제의식으로 관객을 대하는 일반적인 대중영화가 흔히 일으키는 지루함과는 분명 전혀 다른 체험이다.

1997년 어느 봄날 밤 이태원 번화가의 햄버거가게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던 평범한 대학생은 갑자기 접근해온 괴한에게 가슴과 목 등 9군데나 칼로 찔려 참혹하게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현장에 있던 혼혈인 ‘피어슨’과 재미교포 ‘알렉스’가 사건의 목격자이자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미육군범죄수사대로부터 이 사건을 송치 받은 박 검사는, 용의자 심문을 하면서, 미군당국이 1차로 범인으로 지목한 피어슨보다는 현장에 같이 있었던 알렉스에게 용의점이 더 많다고 보고 정황정보를 보강하여, 결국 알렉스를 범인으로 기소하게 된다.

여기에는 미군당국의 불완전한 수사 내력에 의해 흔들릴 수만은 없다는 자주성 있는 태도와, 유력한 아버지를 둔 알렉스와는 대조적으로 멕시코계 혼혈로서 자신을 효과적으로 변호할 여유가 없었을 피어슨의 처지에 대한 고려가 함께 작용하였을 터였다.

영화는 이 충격적인 범행의 범인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즉 ‘후던잇’의 게임에 관객을 초대하고자 하지 않는다.

물론 피어슨과 알렉스의 진술에 따른 사건의 재현을 보여주기도 하고 상충되는 사건 당시의 주변 인물들의 진술들도 생생히 소개하기도 하며, 진범의 추리에 도움이 되는 정황을 관객에게 알리는 노력이 전개되고는 있지만, 이것은 일급살인의 재판과정을 따라가는 일에서 목격하게 되는 자연스런 일의 일부로 다루어지고 있다.

대신에 영화가 힘주어 전면에 내세우는 문제는 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분명 명백한 살인 행위의 현장에 두 사람이 있었고, 둘 중 한 사람이 살인범이라고 시인하는 상황은 분명한데,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고 완강히 부인할 때, 우리의 사법기관은 이를 두고 어떻게 판단해야 할 것인가?

다른 결정적인 목격자가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에 더욱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살해 현장의 정황증거나 관련자의 진술로 인해, 어느 한 사람의 살해 확률이 더 높다는 판단만으로 범인을 지목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끔찍하게 사악한 스스로의 행동을 극도로 기만적인 자기보호의 기교로 가려버릴 경우, 압도적인 규모로 가능할 다양한 경우의 수를 현명하게 헤쳐가며 제한된 인식력과 불완의 추리력에 의존한 선량한 마음은 그 목표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인가?

영화는 냉정하게 그리고 낮은 톤으로 대답한다. 결코 아니라고. 그리하여 우리의 박검사는 알렉스의 혐의를 결정적으로 입증해내지 못하고, 믿었던 피어슨은 자꾸만 말을 바꾼다. 결국 둘 중 하나가 분명한 상황에서 그 하나를 특정하지 못하여, 둘은 모두 무죄가 되고 우리의 사법체계는 아니 인간의 이성적 가치추구 노력은 그 무기력을 스스로 드러내고야 만다.

『오 꿈의 나라』와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그리고 『선택』의 전작들에서 계급과 이념의 측면에서 우리사회가 가지고 있는 편협함과 부조리함을 구조적인 관점에서 통찰한 결과를 고발하였던 ‘홍기선’ 감독은, 『이태원 살인사건』으로 투쟁의 에너지를 관찰과 공명의 태도로 전환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미관계의 불공정성을 상징하기에 그토록 좋을법한 상징적인 장소였던 ‘이태원’을 키워드로 사용하면서도, 그는 인간사회 제도의 불완성과 그에 바탕하고 있는 쓸쓸한 우리사회의 풍경을 담백하게 담아내도록 ‘선택’하는 냉정을 잃지 않았고, 우리는 이 모호함과 답답함을 묘한 톤으로 전달해준 이 맹랑한 작가에게 그만큼 진중해진 사유에 대해 빚을 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