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기획특집] 전종환의 군번없는 6.25 전쟁 학도병 참전기⑧
[투데이안] 6.25 전쟁이 발발하고 7월초 학도의용군에 지원 또는 소집돼 군번없는 군인으로 출정한 학생은 전국적으로 2만 7,700명 이상이다.
이 가운데 전북에서 출정한 학도병은 3,500여명이며, 530여명이 전사했다.
전종환 학도병은 완주 고산 출신으로 1932년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전주 북중 졸업을 앞둔 그는 6.25사변이 발발한 얼마 뒤인 1950년 7월 13일 학도병으로 소집돼 군에 입대한다.
당시 나이는 18세.........
투데이안은 지난 6월 1일 전주고등학교 충혼탑에서 열린 6.25 참전 동문 전사자 8인 추각식에 참석한 전종환 당시 6.25 학도병을 만나 '6.25 학도병 참전 일지'를 근거로 10회에 걸쳐 호국영령들을 되세긴다./편집자 주
◆생사의 길
그런데 공교롭게도 불려나온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교화소에 들어올 때 만났던 우리 담임 선생님, 이규섭 선생님, 송형규 선생님이 마친 우리 감방 앞에 서더라구요.
참 이상한 인연이에요.
그래 깜짝 놀래서 “아. 선생님 어디로 가십니까?” 철창 너머로 대화를 주고 받았어요.
“우리도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르겠다. 대전으로 간다는 말도 있고 어디로 가는지 또 그냥 일 시키려고 불러내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선생님 혹시 먼저 나가시게 되면 저희 집이 재판소 뒤에 있으니까 저희 집에 꼭 연락 좀 해 주십시오.
살아있다고.” “어! 그래, 너희들이 먼저 나갈지 모르지. 너희들이 먼저 나가면 우리 집으로도 가거라.” “네.”
그래서 서로 가족과 연락할 수 있는 방도를 얘기하고 조금 후에 요원 인솔 하에 끌려 나갑디다. 그게 마지막으로 죽음의 길이 될 줄이야.
그런데 유청 선생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때 유청 교장선생님은 마침 교화소 간수 중에 아는 청년이 있었는데, 그 간수가 전세가 악화되어 인민군이 밀리게 되니까.
유청 선생님께 서로 살기 위한 조건을 내걸었어요.
“내가 선생님을 지킬 테니 후에 선생님은 나를 살려주시오. 조만간 요원들이 와서 호명하거든 절대 대답하지 말고 가만히 계십시오.”
이런 밀약으로 유청 선생님은 위기를 모면했고 그 청년 간수는 UN 진군 후에 유선생님댁 천정에 숨겨 주었다가 후에 자수를 시켜 일정한 죄 값을 치른 후에 잘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유청 선생님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농악을 치며 살육행위
전에 말씀드린 대로 전신주에서 걷어낸 전선 있지요.
그 전깃줄을 갖고 손을 뒤로해서 뺀치로 꽉꽉 비틀어 매어 꼼짝 못하게 한 후 밤중에 데리고 나가서 교화소 바로 담 너머에서 처형하는데 근처 부락에 있는 농민들을 선무공작해서 술을 몽땅 먹인 후 “원수를 죽여야 한다.”는 구호를 외치게 하며 뒤로 철사로 꽁꽁 묶인 그 수감자들을 농기구로 찍어서 죽였습니다.
◆주민생활
밤낮을 막론하고 미공군의 폭격과 기송소사가 있었다.
7월초 중앙동 1가 일대에 폭격이 있었고 1주일 후에 고사동에 있는 구 전매청 폭격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낮에도 사이렌이 울리며 항공(비행기가 출현하였음을 뜻함)을 외쳤고 밤에는 등화관제가 실시되었다.
주민들은 수송로 보수와 반공호 파기에 동원되었다.
특히 덕진 용산철교가 파괴되어 밤이면 수많은 주민들이 동원되어 가마니에 흙을 넣어 둑을 쌓고 철로를 깔았다.
완성되면 다시 폭격이 있었고 둑을 다시 쌓는 작업이 되풀이 되었다.
또한 낙동강에서 부상당한 인민군을 남원길로 오는 것과 기차로 전주역에 도착하여 오는 것을 릴레이식으로 운반하여 예수병원과 도립병원으로 후송하였다.
좁은 목과 전주역에서 가마니 꺼적대기 들것을 새끼줄로 어깨에 메고 운반하고 다음 사람에게 인계하는 식이었다.
다른 주민들은 밤이면 노력동원 등으로 방공호를 파거나 공산주의 학습과 북한 찬양 강연을 듣고 적기가를 배웠다.
◆우익 인사의 학살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인민군이 낙동강전선에서 패배하였다.
9월 27일 인민군과 좌익들이 전주에서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지방 좌익들이 도주하기전에 도처에서 살육을 감행하였다. 우물 속에 생매장을 하고 삽과 곡괭이로 찍어 죽였다.
이때 전주형무소에 수감된 우익인사를 학살하였다.
공무원, 경찰, 우익인사들이 90여 개의 감방에 1천 오백여 명이 수감되어 있었다.
24일 밤부터 한 명씩 불러내어 구덩이 앞에서 곡괭이, 삽으로 타살하였다.
27일에는 형무소 책임자가 남은 수감자를 마당에 집합시킨 뒤 석방을 시작했다.
도중 구빨치산 출신들이 오토바이 3대를 타고 들이닥쳐 모두 사살하였다.
형무소 외에도 도청앞 완주군수 관사가 있었는데 다다미방 밑에 곡괭이로 눈이 찍힌 학살자가 30~40명 있었다.
성당 동쪽 골목 남쪽 작은 제사공장이 있었는데(김미화 무용 연구소) 앞 뜰 방공호에도 몇 십구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수복후 전주는 국군 11사단이 주둔하였고 남원에는 지리산 지구 경찰전투사령부가 설치되어 빨치산 토벌전을 전개하였다.
그럼에도 열차 습격과 경찰지서 습격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가 하면 11사단 일부장병의 만행과 일부 경찰 토벌대의 만행도 잇달았다.
이때의 빨치산 피해는 두 번째인 것이다.
첫 번째가 1946년 10월 폭동으로 산에 도망간 수배자들이 야산대를 조직하여 지서를 습격하고 주민을 괴롭혔다.
구빨치산이다. 두 번째가 9.28후 산으로 도망간 신 빨치산에 의해 또 다시 지서가 습격을 당하고 주민은 보급투쟁의 희생이 되었다.
1953년 7월 휴전으로 총성이 멎었다. 북한은 빨치산 교환을 거부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의문의 죽음과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가 사살되자, 빨치산은 귀멸되고 말았다. 실로 7년 만의 일이었다.
9월 28일 수복을 앞두고 이틀 전부터 수감자 대부분을 구더기를 파게하고 생매장 또는 살해 했으며, 그 틈바구니에서 천우신조로 구사일생 살아나올 수 있었습니다.
전주도 서울과 같은 9월 28일에 UN군 탱크부대가 진격해옴으로서 감격스러운 수복을 맞이하였고, 그 후 학교에 복귀하여 다음해 51년 중학교 6년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진학 하였다.
4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치고 사회진출을 하려했으나 군복무를 필해야만 하는 엄격한 병무제도 때문에 과거에 학도병으로 종군한 사실을 물적으로 입증할 수가 없었다.
졸업 1학기를 앞두고 국방부의 “CSMC제도”에 묶여 무조건 의무적으로 광주 보병학교에 입대, 10주간의 소정훈련을 마치고 난 후 대학에 돌아와 나머지 학업을 마치고 졸업장이 교부되는 상황이었다.
4년의 학업을 마치자 졸업장과 소집영장이 맞교환 되다시피 하여 육군병기지사령부(부산소재)에 배속되어 1957년 11월 10일까지 2년간 “SO군번”을 받고 일등병으로 복무, 만기 제대하였다.(SO군번 : 0003724)
병역을 필한 후에야 비로소 떳떳하게 사회진출을 할 수 있었으니 이후 42년간 내무행정에 몸담아 순창, 완주군수, 도보사국장, 내무국장, 정주시장, 군산시장, 익산시장과 도청 기획관리실장을 역임하고 1992년 정년명예퇴임을 하였습니다.
6.25 당시 비록 짧은 기간이었으나 이 몸이 겪은 고난과 풍파는 그 기간에 견줄 수 없는 엄청난 시련이었고,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국가의 운명을 일단이나마 수호하는 대열에 동참했다는 자부심이 이 가슴에 지금도 연면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거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서류상의 근거가 전무한 것이 한이 됩니다.
그러던 차에 전 국방부장관이었던 오자복(吳滋福)장관과 사돈의 인연을 맺게 되어 (이 몸의 여식이 오장관의 자부로 출가) 환담 중, 동란시 학도병 출정 사실을 회고하며 군적 확인을 의뢰하였던바 “9710_” 군번은 극도의 혼란 중에 병적 정리가 되어있지 않아, 근거를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어서 아쉬움 속에 체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요사이 그 당시 학도병으로 같이 종군했던 학우들로부터 “6.25 참전 사실 확인”을 해준다는 소식을 듣고, 원호청에 문의하여 기쁨과 설레는 마음으로 서류를 갖추어 본 신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맺는 말씀
장황한 글이 되었습니다마는 그때의 상황을 본인은 자신 있게 당당하게 기술하는 바입니다.
이제 숙년의 팔순길을 걸으면서 오직 바라는 것은 “열아홈 살 학생시절, 그 엄청난 6.25동란 회오리 속에 나도 용감한 학도병으로 출정하였노라”고,
▷전주고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졸업, ▷전북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석사, ▷원광대학교 행정대학원 최고정책관리자과정수료, ▷전라북도 기획관, ▷순창군수, ▷완주군수, ▷전라북도 보건사회국장, ▷식산국장 ▷내무국장, ▷정읍시장, ▷이리시장, ▷군산시장, ▷전라북도 기획관리실장(이사관 정년퇴임), ▷전라북도 교통문화연수원장, ▷(주)한풍 상임고문, ▷전라북도 애향장학재단 이사 ▷대통령 표창, ▷6.25참전유공훈장, ▷국가발전 유공자 표창, ▷녹조근정훈장, ▷적십자 유공장, ▷애향장, ▷서울대학교 공로장, ▷노태우-전두환 대통령 표창메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