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견훤왕을 생각한다, 후백제를 생각한다, 완산도읍을 생각한다.

2021-05-28     엄범희 기자
한봉수 문학평론가/전북과미래연구소장/후백제시민연대추진 공동대표/본사 고문

/한봉수 문학평론가, 전북과미래연구소장, 후백제시민연대추진 공동대표, 본사 고문

[투데이안] 금년 1월 국립전주박물관에서 ‘견훤(甄萱), 새로운 시대를 열다’라는 기획전이 개최된 바있다.

필자는 시간을 내 한시간 정도 관람하고 왔다. 기획 전시관에 갈 때마다 관람객들이 거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전주(완산)의 역사에 테마를 두고 잘 준비한 특별전에 시민들과 방문객들 발걸음이 없다는 것이 섭했다. 아마 행사를 몰라서 못오는 것이 아닐까 혹은 코로나19 거리두기 때문이라고 안위했었다.

전주에 이어 3월말에 상주박물관에서 '역사에서 신화가 된 견훤'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이 이어져 지역민의 큰 관심을 끌었다는 보도를 접한 바 있다.

연이은 특별전은 견훤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영호남 교류라는 시대적 요구와 역사적 당위성을 정립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한다.

어떠한 면에서 견훤왕이 영호남 교류에 의미가 있을까?

견훤(甄萱)은 상주 가은현(加恩縣: 현 경북문경 가은읍)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상주는 백제와 인접한 신라의 북서쪽 변방으로 백제인들이 점령지 학정을 피해 대거 입주한 지역이다.

견훤의 '견 甄'씨 성은 백제의 성씨인 '진'으로 발음<완산 견씨세보>하는 것이 더 옳다 .

원래 질그릇 견은 진으로 읽힌다. 후세 탄압을 피해서 일부러 발음을 견씨로 불렸다고 한다 <견훤의 출신지와 초기 세력 배경, 이도학 저>.

진훤(甄萱)은 장성해서 군대에 입대한 뒤 싸울 때마다 항상 선두에 나섰으므로, 그 공로로 비장(裨將)이 됐다.

신라 말기에 전국적 민란이 일어난 원인은 농민들의 불만이라 하지만 근본적으로 고구려와 백제 유민의 학정에 대한 불만과 관계가 있었다.

고구려 땅에서는 태봉국을 세운 궁예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왕건이 일어났다. 후백제의 견훤왕은 한때는 세력이 커서 왕건이 가장 두려워했던 존재이다.

왕건이 유훈으로 남긴 훈요십조에서 ‘차현(車峴) 이남의 인재를 등용하지 말라’고 했는데 후백제의 인재들을 등용해서 나라를 빼앗길지도 모르는 불안감으로 유훈으로 남겼다.

견훤왕은 정세를 포착하고, 서남지방 순천만에서 세력을 형성해 5천군사로 광양 마로산성을 접수하고, 892년 무진고성(현 전남광주)을 점령했다.

마침내 900년에 완산(完山)를 도읍으로 백제(百濟)를 건국했다. 후백제는 후세 역사가들이 구분해 지은 이름이다.

완산에 도읍을 두고 후백제의 도성,궁성,동고산성, 장수산성등 많은 유적을 남겼다.

전주(완산)로 천도후 견훤은, "내가 삼국 기원을 상고해보니, 마한이 먼저 일어난 후 혁거세가 발흥한고로 변한 진한이 일어났다.

이때에 백제는 나라를 금마산에서 개국해 600년이 됐는데 당고종이 신라 요청으로 소정방 13만 수군, 김유신의 권토로 황산에서 사비에 합공으로 멸망했다.

지금 내가 감히 완산(完山)에 도읍하여 의자왕의 숙분(宿憤)을 설욕하지 않겠는가?" 라는 어록을 남겼다.

나라 이름도 백제라 했으며 세상을 바르게 열어보자는 뜻으로 국호를 정개(正開) 라 해 완산의 백성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전주시를 고도(古都 옛도읍)라 하는 이유는 장대한 꿈을 가진 '일국 (후)백제의 수도'였다라는 의미다.

1120여년전 통일국가의 염원을 담은 마지막 백제의 수도다.

후백제는 비록 48년간(889년 ~ 936년) 존속한 후 멸망했지만 완산을 도읍지로 정해 산성을 쌓고 커다란 왕궁을 지어 전주(完山)의 영광을 드러내게 한 역사로 남아 있다.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상지일 뿐만 아니라 견훤이 900년부터 무려 37년동안 후백제의 수도로 삼았던 왕도(王都)였기 때문에 천년고도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 기간이 길지는 않더라도 한 나라의 왕도로서의 경험은 다른 도시에서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전주만의 역사이다.

견훤은 뛰어난 용장이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아도 그가 왕건에게 보낸 편지에 ‘내가 목적하는바는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어놓고 말에게 대동강의 물을 먹이는 것이다’ 라 하며 적에게 삼국통일의 야심을 내비친 호걸이다.

전주시민과 전북도민은 마한(馬韓 충청.전라지역 54개 부족국가)을 표방하고 백제가 신라보다 앞섰음을 긍지로 삼아야 한다. 백제를 이은 후백제의 도읍이었음을 자랑으로 삼아야한다.

이를 위해 완산 정신의 재발견과 완산 문화권 정립이 시급하다. 이는 '전주시 관광문화 거점도시' 지정의 진정한 의미이다.

견훤이 외친 완산의 이름으로 완주와 전주는 완전하게 하나로 천년의 역사를 이어 왔음을 마음에 담아야한다.

 ‘후백제 왕궁 터’ 추정지는 음택풍수의 ‘왕릉 터’ 추정지인 ‘무릉’과 함께 ‘궁성’으로서 요건을 갖추었다

◆완산도읍을 생각한다.

일제가 강점하고 행정개편한 1914년에 완산은 ‘완산정‘이란 동(洞)단위의 이름으로 축소됐다. 전주군은 1935년 전주부와 완주군으로 강제로 갈라 놓였다.

그뒤 전주시는 뒷걸음쳐왔다. 비례해 전북의 도세는 퇴보해 왔다.

그래서 전주와 완주의 이름 복원과 통합은 숙명이다.

그동안 지역의 분리는 역사의 큰 흐름을 차단코자 하는 일제의 농단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견훤왕을 생각한다.

후백제 왕궁터를 복원할 수 있다면 그 모습 그대로 친환경적으로 복원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가치 있을까.

후백제는 전주의 한옥마을 못지 않은 잠재되어 있는 미래 관광자원이다.

후백제 유산에 대한 국가문화재 등재 작업을 서둘러 추진해야 한다. 후백제 ‘正開’ 연호가 새겨진 편운화상부도가 우선 순위임은 분명하다(이도학교수 주장).

또한 후백제문화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일을 추진하는 미래전략을 서둘러 수립해야 한다(곽장근교수 주장).

논산에 가면 견훤왕릉이 있다. 정갈히 관리되어 있지만 덩그러니 큰 봉분만 있어 쓸쓸한 소감이 든다.

논산시장 명의의 안내문이 마음에 든다.

“후삼국중 가장 강성했던 후백제를 창건한후 중국의 오,월나라와 대등한 국교를 맺고 후삼국 통일을 염원했던 우리 지역 유일의 왕릉인 견훤릉입니다“ 논산시민의 자긍심이 엿보인다.

문경의 가은읍은 견훤의 생가와 자라던 곳들과 아비인 아자개의 유적까지 스토리텔링하며 견훤의 영광을 드러내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후백제 역사와 관광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

◆후백제를 생각한다.

최근 전주시민들이 모여 후백제 역사정립과 역사인식 확산을 위해 후백제시민연대를 출범시켰다.

다음 달에는 후백제학회(회장 송화섭교수)가 주최해 ‘후백제와 견훤 ’이란 주제로 학술세미나 및 시민대토론회를 앞두고 있다.

전주시와 전북도 역시 힘을 합해 후백제 도성과 궁성 등 유적 발굴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어디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불쑥 나올까? 노송동과 인봉리에서 궁성터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대왕릉 같은 둥근 산이 시내 가까이 있다는데 거기가 바로 견훤의 관이 묻힌 진짜 왕릉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