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봉수 투데이안 고문 '서정주시인 귀천 20년' 그를 다시 생각한다

2020-12-23     엄범희 기자
한봉수 투데이안 고문/전북과미래 연구소장

“윤동주가 죽어서 민족 자존심과 영혼을 지켜주었다면, 서정주는 살아서 민족어의 생명을 찾아줬다“

[투데이안] 서정주 시인은 “내가 아조 돌아가면 어릴 적 떠난 소녀들이 돌아 오려나, 나는 단 하나의 정령이 되어 그들을 불러본다. 아, 그 옛날 보리밭 길 위에서 그 소녀들은 언제나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미당시,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 이같이 영통(靈通)하듯 시를 썼다.

12월 24일은 시인이 그리던 곳, 영원의 생명을 꿈꾸던 곳으로 간지 20년이 되는 날이다(2015 ~ 2000).

시인은 그 소슬한 시름의 주름살들 그대로 데리고 기러기 여행하듯 살고 싶어하더니 (미당시, 가을에) 그렇게 떠났다.

그가 태어난 땅은 국토도 없고 언어만 있는 식민(植民)의 땅이었다.

간간이 들리는 건 민족혼 깃발 같은 갑오년 이야기, 날 때부터 그는 종의 아들이었다.

그를 키운건 8할이 바람이었다(미당시, 자화상). 그에게 오로지 시를 쓰는 것은 바로 생명이고 목숨 이었다.

니체가 말한 원초적인 낙타의 굴종의 시기도 있었다.

시의 이슬에 빨간 피 몇방울 이마에 비치며 쫒기는 수캐마냥 혀를 내밀고 헐떡이며 살기도 했다.

그러다가 니체가 말한 저항의 청년 정신의 시절, 광주학생의거 주동자로 사자처럼 일제에 투쟁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투옥되고 문제의 저항학생으로 찍혀, 받아주는 학교에서 결국 쫓겨나 졸업장도 없는 처참한 시절이 있었다.

오랜 후 그가 거처간 중앙고보와 고창고보에서 명예졸업장을 줬다.

30세 전에는 발간한 <화사집> 수록 시(「화사」·「문둥이」·「맥하」·「입마춤」)처럼 심미적 악마주의적 격정의 시를 썻다.

이후 평혼을 찾아 가며 해방후 발간 시집 <귀촉도> 수록한 시 (「귀촉도」·「목화(木花」·「푸르른 날」·「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처럼 순구한 어린아이 단계로 운명을 이겨내듯 향토색 짙은 민족시를 쓰며, 평생 민족 문학의 역사를 써내려 간다.

비슷한 시대 또다른 천재 윤동주시인이 있었다. “윤동주가 죽어서 민족 자존심과 영혼을 지켜주었다면 , 서정주는 살아서 민족어의 생명을 찾아줬다” 고 표현하고 싶다.

그의 시는 민족어의 진생맥 (윤재웅시인 표현)이다. 친일 시, 수필등 11편으로 가족들과 본인의 목숨을 구한 배신자가 되어 그의 ‘자화상’시처럼 이마에 진한 분홍글씨가 묻어 살았다.

다른 친일파와 달리, 돈이나 직위하나 받은 댓가 없이 오로지 목숨과 시혼(詩魂) 하나 구걸했다.

조국없이 태어난 자가 조국을 배반한 것도 아리러니 하다.

친일시로 민족을 배신했다면 민족의 얼을 살리는 문학적, 민족정신적 시업적도 남겼다.

한국시의 본령을 개척.부흥시키는 대표주자로서 시단에 우뚝 서왔다.

한마디로 그는 ‘시의 정부(政府)’이다( 고은시인 표현). 그렇다. 일제 때 미당은 ‘문학의 독립정부’ 였다.

그의 호는 지인이 지어줬다. ‘미당(未堂)’ 뜻을 시적으로 풀으면 “영원한 소년이고자 하는 마음” 이라 했다.

성공한 시인은 교과서적인 인생시를 몇 편 남긴다.

미당의 시는 수십,수백편이 인생시로 평가받는다. 그는 반민족행위를 참회하다가 죽고, 죽어서도 고창 질마제 문학관에는 참회방에서 친일시를 걸고 아직도 참회하고 있다.

영혼의 속살까지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지난해 3월 19일, 국회 세미나 ‘3.1절 100주년 일제강점기 한국문학사 재조명’ 주제의 정책토론에 참석했다.

토론자중에 전일환교수의 “미당의 순박성을 이해하고 이제 흑백논리적인 비평보다 양면적 평가해야 한다”는 말에 공감했다.

또한 황송문교수는 문학예술의 목적은 아름다움에 있고 균형과 조화에 있으므로 그러한 문학정신에 따라 위대한 업적까지 일부러 매몰시키는 일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했다.

한국의 문학사는 이제 과거보다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저항과 예술적 창조 두 국면이 균형있게 비평돼야 한다.

발표자인 김동수교수는 “편협한 국수주의처럼 치우치지 말아야 하는 문학예술사관이 정립되어야 할 때”라고 했다.

중앙의 큰 언론사에서 시인 사망 다음해 2001년 제정해 권위 있게 시상하던 미당문학상은 끝내 막을 내렸고 그 상 받은 유망한 문학인마저 난처한 처지에 있기도 했다.

다른 친일문인기념 문학상도 모두 폐지됐다.

몇 년전 국화꽃 만발한 날, 고창군 선운리( 질마제) 시인이 살던 곳에서 열린 ‘미당문학제’에 참관한 적이 있었다.

윤동주시인의 육촌 동생인 윤형주 가수의 특별 축하공연과 전국 시낭송대회, 청소년 백일장도 열린 고창군과 문학인의 축제날이다.

문학관 대문 밖에서는 어느 무리가 전단지를 날리며 확성기로 종일 행사를 방해했다.

급기야 큰 깃발 들고 언덕에 오르던 무리가 미당의 묘에서 시위를 하는 장면을 봤다.

경찰도 부리나캐 쫓아가며 타이르던 모양이 영화같은 장면이라 솔직히 필자에게는 너무 슬펐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삼일절 101주기가 지났다. 중.고 교과서에 열 서너편이 수록된 미당시는 벌써 제거 됐다.

이제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 과제는 한국문학사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다. 수십년 전 그 시대 과오를 이 시기 잣대로 시험해 문인과 문학사조차 멸절을 시키는 문화가 좋은 건지 생각해 볼 때다.

이제 더 큰 한민족 문학사 정립을 해야 하는 시대이다.

서정주는 단군 이래 4대 최고 시인인 최치원, 이규보, 서화담과 함께한다. 필자에게는 미당의 시가 으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