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상견례

2011-05-10     엄범희 기자

조 현철 (군산대학교 교양교직과 교수)

때는 바야흐로 1980년대 말, 전라도 남자가 군대에서 펜팔로 맺어진 천생연분 경상도 여자와의 사랑을 사회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여인의 집이 있는 부산으로 내려간다.

그가 꼭꼭 숨겨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출생의 비밀. 그것도 출생지의 광역적 구분에 따른 명칭인 ‘전라도’라는 글자 석자를 말이다.

발음교정 전문가의 사사를 받아 ‘강남 정체성’으로 급히 무장한 채 부산으로 향하는 고속버스 안에서 그가 소음공해라는 민폐를 끼쳐가며 연습해야 하는 문장들은 이렇게 시작된다.
 
“뉴~스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전라도라면 이를 간다는 병을 가지고 있는 예비장인의 허락을 득하기 위한 노력이라는데, ‘경상도’의 ‘경’자에 경기를 일으키는 것은 예비시아비도 마찬가지여서, 이 불쌍한 남녀의 처지는 과히 셰익스피어의 비극 『로미오와 쥴리엣』의 경우에 버금간다고 할 것이리라.

사실 많은 로맨틱 코미디의 기본공식 속엔 ‘로미오와 쥴리엣’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마련이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관계지향적인 문화권 속 청춘남녀들의 결합기에는 가족적 환경의 특성이 그 결합을 방해하는 중요 인자로 작용해 왔다.

그러다보니 부모의 반대나 소속 가정의 사회경제적 격차 등 온화한 수준의 장애물들이, 이제는 나중에 밝혀지는 출생의 비밀에 따라 (유사) 근친상간의 위험을 수반하는 난공불락의 벽으로 바뀌게 된지 이미 오래이다.

그에 따라 드라마 속 우리시대 선남선녀들은 갈 수록 고난도의 문제를 풀어내야 하게 되었고, 대중은 그에 대해 여전한 환호로 답하였으나, 평단은 ‘막장드라마’라는 타이틀로 이를 저주하여 온 것이 오늘의 세태이다.

『위험한 상견례』는 그 ‘위험’의 요소를 대한민국의 망국지병 중 하나인 영호남간 지역감정에서 찾고 있다. 교통 통신의 눈부신 발전을 목격하는 세상에, 출신지가 다르다 하여 애끓는 청춘남녀의 연애지사가 도전받을 수 있다 함은 터무니 없다 할 것이다.

허나 수십 년의 정치사에서 수없이 확인되어 온 선거들의 결과가 압도적으로 웅변하는 내용은, 그러한 불합리성이야말로 여전히 존재하는 우리시대 자화상의 한 면모라는 사실이다.

더욱이 우리네 민주화가 아직 청년전기의 미숙한 활력으로만 작동하던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불합리한 정치적 정서가 개인사의 많은 것을 결정하던 상황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좌절감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렇게 『위험한 상견례』가 영화 내적 긴장과 사회적 함의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는가의 여부는, 바로 영화의 시대적 공기인 ‘영호남간 적대의식’을 어떻게 스토리라인의 적재적소에 투입시켜, 보는 이의 반성적 사고의 결과를 이끌어내느냐에 있었다.

일단 로맨틱 코미디의 정체성을 표방하고 나선 영화는 시대적 맥락이라는 설득력을 획득하고 출발한 주제를 발전시킴에 있어, 그 유머를 제조하기 위한 노력에 강력한 집중력을 발휘한다.

어눌한 말투와 결코 위압적이지 않은 외모를 소유한 신인스타 ‘송새벽’은 어리숙한 전라도 총각의 진정성을 전하는 과정에서, 개성과 자연스러움의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은근한 웃음을 자아내는 공을 발휘한다.
 
그리하여 그가 ‘사면경상가’의 상황에서 “서울은 고향입니다”를 당황하면서 내 뱉거나, 막차를 노친 후 ‘행복한 동침’을 맞게 되는 여관방에서 손만 잡고 자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랑스러운 여인에게 “손 말고 다른 데가 잡을 것이 있간디요~”하고 중얼댈 때에, 깐깐한 관객이라도 무저항의 웃음으로 대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가히 ‘대스타 송새벽’으로의 기나길 여정의 빛나는 여명을 내비치기에 손색이 없다.

외골수 경상도 아버지와 그의 ‘위장 강남족’ 아내의 배역을 맡은 ‘백윤식’과 ‘김수미’는, 코미디의 스토리라인 속에 다소 성기게 구겨 넣어져 튀는 언행내용을 예의 그 노련한 발성과 어조 및 표정으로 능숙하게 요리해내며 영화가 시도하는 공식적인 유머 창출의 대부분을 감당해낸다.

그러나 양가의 주변인물들의 배역에는 맥락무관의 죠크 수행의 의무가 지워진 탓에, 영화는 때때로 슬랩스틱 코미디로의 위상전환을 감수하는 수준에 머물기도 한다.

그러나 『위험한 상견례』의 가장 ‘위험한’ 부분은 스스로 지역감정이라는 괴물과 전면전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영화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자폐적 인물군상을 묘사하고 비틀면서도 이 선남선녀의 연애사에 애로를 제공하고 해결해주는 여유를 충분히 부릴 수 있었다.

대신 영화는 영호남간 적대의식이라는 소재를, 다소 과장된 방식으로 그저 자신이 경작하는 웃음밭의 거름으로만 활용할 뿐이다.

그리하여 활짝 피운 식물은 그저 산발적으로 솟아오른 잡초들의 군상을 이루어냈다. 그중 일부는 간혹 그럴듯한 열매를 생산하기도 하였지만 말이다.

급기야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클라이막스에 오면 두 집안 가장간 갈등의 정체는, 두 사람의 소시적 활동경험 상 형성된 지극히 개인적 차원의 라이벌쉽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하필이면 그런 관계에 있었던 사람들의 아들 딸이 이 넓은 대한민국 내에서 자발적으로 만나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인데. 영화는 이런 우연 이외에도 다른 더 희한한 우연의 요소들을 겹겹이 활용하여, 결국 두 남녀의 사랑이 기어이 실제적 결실을 맺도록 해피엔딩을 이루는 작위를 감행한다.

그에 따라 영화는 지역감정을 매개로 한 우리사회의 풍자와 그로 비롯된 해학을 발하는 경지에서 한참 멀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 전개 상 견고한 개연성을 구축하는 데에도 실패하고 만다.

그리하여 나는 영화 속 ‘송새벽’의 대사를 활용하여 결국 이렇게 외치고 싶어진다. “현실을 속이는 건 예술에 대한 반칙이에요!”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