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 스피치』

2011-03-19     투데이안

조 현 철 <군산대학교 교양교직과 교수>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여러 사람 앞에서 연설을 유난히도 하지 못한다.

여러 치료사들을 전전해 보아도 아무 효과가 없다. 그러다가 아내가 추천해준 한 허름한 언어치료소에서 고집스럽고도 능숙한 치료사를 만나, 차도를 만들어나갈 희망을 발견한다.

그 영민한 치료사가 자신이 화를 내거나 욕을 할 때에는 유창한 말을 생산하고, 다른 음악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에는 『햄릿』의 대사를 유려하게 읽어나간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결국 위압적인 아버지와 자신을 주눅 들게 했던 잘난 형 그리고 자신을 학대했던 첫번 째 유모 등 어린시절 성장과정에서의 압박요인들로부터 얻게 된 강박증의 결과를 말더듬증으로 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는 이 증상을 극복하며 동시에 이 치료사와 친구가 된다.

‘킹’이라는 코드를 빼고 이 영화를 소개하면 상기한 바와 같다. 특별할 게 없는 그야말로 상투적인 휴먼드라마 혹은 평범한 『TV 인간극장』의 한 에피소드로 적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로얄’의 키워드가 덧붙여지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진다.

왕의 언어장애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대단히 극적인 이야기의 전개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 남자는 영국 왕의 둘째 아들 요크 공이었고, 치료사는 학위도 허가도 받지 못한 늙은 실패한 연극광이었다.

그리고 이 미천한 인물 앞에서 치료 목적 상 이 위엄을 갖춘 신사가 고백해내야 하는 과거사는, 조지 5세를 비롯한 위대한 인물들이 관여하는 영국 왕실의 비밀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여기에 선친왕의 사망과 황태자의 용납 받을 수 없는 저 유명한 심슨 ‘부인’과의 결혼 문제가 겹치고, 그에 따른 왕위 계승에서의 극적인 변화가 이 말더듬이 왕자를 조지 6세로 즉위케 하는 역사가 연출되면서, 이제 ‘킹스 스피치’는 아주 중대한 주제로 부각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탄기념 연설의 부담으로 그를 찾기 시작하였던 왕자의 사업은, 결국 2차 대전 중 나찌 대항 선전포고의 수행이라는 막대한 책무의 완성으로 확대되었다.

영화는 이러한 스토리라인 상 극적 전개의 리듬을 십분 활용하면서, 특별히 인위적인 조작이나 선정적인 자극의 도입 없이도, 우아한 격조를 유지하면서 그 긴장과 흥미의 점강법적 확장을 이루어내고 있다.

여기에 왕과 미력한 평민이라는 신분간 차이에 따라 발생하는 심한 불균형을 영민하게 활용하는 재치를 발휘하면서, 『킹스 스피치』는 긴장과 유머를 함께 구사해낸다. 치료사는 이 존엄한 고객을 구태여 ‘전하’가 아닌 ‘버티’로 부르기를 고집하고, 왕궁으로 불려가는 대신 자신의 사무실로 환자를 불러내는 당당함을 발휘한다.

왕자는 이에 급한 성정과 태생적인 오만함으로 저항 반발하지만, 치료사의 그 ‘뱀같은 혀’의 놀림으로 항시 정곡을 찔리는 경험을 하게 되고 그의 트라우마는 서서히 ‘다루어짐’을 받는다.

그에게 있어 ‘유려한 킹스 스피치’는 시대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막중한 과업이면서 동시에 온전한 자아의 발견과 회복의 과정으로 작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시종 왕족의 품위와 우아함을 닮은 격조를 유지하던 영화는 그러나 마지막 대목에서 상당한 균형 상실의 대목을 노출시키고야 만다.

아직 불안정한 회복 상태에 머물던 우리의 신임 왕은 드디어 성공적인 대관식을 마치고, 이제 일생 일대의 중요한 임무를 ‘말’로 해내게 되었다.

바로 히틀러를 상대로 대영제국의 결연한 투쟁을 국민과 함께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유능한 친구의 현장 도움으로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국왕에게는, 온통 축하의 찬사가 쏟아진다.

이제 우리의 주인공은 ‘당당히’ 군주가 된 것이다. 때맞게 깔리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황제) 2악장의 테마와 함께!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비극에 참여함을 알리는 상황에서의 비장함과 심각성을, 왕이라는 개인적 존재의 언어장애 극복에 대한 국민적 환희가 압도해버리는 것이다.

이 모두가 제목에서 약속한 대로 영화가 ‘왕의 연설’에만 집중한 결과이니 그 일관성만큼은 나무랄 수 없겠지만, 바로 이 부분에서 시대극인 이 영화의 생태학적 타당도에 손상이 이루어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올 2월 미국 영화아카데미의원회는 이 전체적으로 사랑스럽고도 우아한 휴먼드라마에게 노른자위 상들을 부여하였다.

왕실이라는 특별한 상황 속에서 보편적인 성장드라마의 주제를 영리하게 이끌어낸 연출자 (‘톰 후퍼’)에게 감독상을, 극적인 상황과 개성있는 인물의 묘사를 긴장과 유머의 언어로 함축성 있게 완성한 작가 (‘데이빗 세이들러’)에게 각본상을, 언어장애라는 불완전한 행동양태를 완벽한 기교로 표현하면서 그 내면의 강박을 미묘한 표정과 억양으로 노출시킨 연기자 (‘콜린 퍼스’)에게 남우주연상을, 그리고 전체적인 만듦새의 완성도와 훈훈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작품 자체의 힘을 유지한 점에 대하여 『킹스 스피치』에게 작품상을./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