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

2010-12-27     엄범희 기자

조 현 철 <군산대학교 교양교직과 교수>

- 날것의 생생함이 순간과 부분의 미덕으로만 남는, 『추격자』의 감각 확대 버전

‘나홍진’, ‘하정우’, ‘김윤석’ 3개의 키워드가 조합하여 일으킨 『추격자』 현상은 2008년 우리 영화계의 중대 사건이었다.

두터운 현실 맥락의 옷을 입은 채 밀도 높은 방식으로 극적 긴장을 극대화시켜가던 신인감독의 이 영화는, 사회비판의 여유를 품은 잘 만들어진 스릴러의 한 전범으로 손색이 없었다.

충무로의 블루칩으로 떠오른 이 3인방의 올 겨울 극장가로의 귀환을 반기는 것은 바로 그 『추격자』의 효과이다.

이번에도 관객은 그 『추격자』를 추격할 만한 작품으로 입장료와 다리품에 대해 듬뿍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황해』도 역시 ‘추격자’이다. 영화는 3남자의 추격을 중계한다. 한 남자는 달아난 부인을 그리면서 빚에 쪼들려 비참한 생활을 견뎌야 하는 연변 남자 (하정우)로서, 서울에서의 청부살인 한 건의 수행으로 그러한 굴레에서의 이탈을 꿈꾼다.

영화의 초반은 자연스레 ‘강남에서 김서방 찾기’를 수행하는 그의 추격을 다룬다.

그러나 이것은 영화 속 중다추적의 시작이며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그의 목표물에는 강남의 다른 추격자 (조성하)가 있었고, 그는 곧 경찰과 이 강남추격자에 의해 추격당하게 된다.

강남추격자는 그 뿐만 아니라 증거인멸을 위해 그에게 청부살인 명령을 내린 연변의 건달 (김윤석) 또한 추적 제거하려 한다.

이 건달은 다시 복수와 사업을 위해 한국에 돌아온다. 연변 남자는 자신을 위협하는 자들과 또 자신을 철저히 착취한 연변의 건달에 대한 복수를 위해 처절한 역추적을 진행해 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추적들을 이끄는 각자의 근본 동기들은 영화 후반에 아주 엷은 단서를 통해 인색하게 노출된다. 4각의 치정관계를 중심으로 말이다.

사실 『황해』는 복잡한 상호 연쇄추적의 묶음상품이다. 영화는 이 과도한 추적의 상호 연쇄를 구성하기 위해 온갖 무리를 감행한다.

서로 다른 이유로 동일한 타겟에 대한 청부살인이 정확히 동시에 시행되어야 했다.

연변사내는 다수 경찰의 공개적인 추적쯤은 여러 번씩 거뜬히 넘겨버리기 일수이고, 식칼 하나로 거의 모든 대결에서 살아 남게 된다. 거의 모든 헐리우드식 영웅 혹은 악당의 초인적인 기량을 넘보는 수준으로 말이다.

연변의 건달 또한 도끼 한 자루면 거의 모든 건달들간 전투에서도 일당 백으로서 무적의 신화를 자랑한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난무하는 폭력과 인간살육의 과잉은, 충실히 묘사되는 만큼 불쾌감의 정도만 더해지는 형국이 되었다.

물론 영화의 사회적 맥락을 재현하기 위한 물리적 구성은 매우 충실하다.

연변의 부산하고 이국적인 거리와 황량한 조선족 거주공간의 묘사는 현실감이 물씬하고, 황해를 건너는 밀입국 상선의 분위기는 그 현장감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액션의 사실성을 구사하기 위한 노력과 기량도 탁월하다. 특히 추격자들간 카체이싱 장면의 연출은 기술적으로 손색이 없다.

수십 대의 차량의 질주 속에서 자동차의 경적 소리를 간간이 부각시키는 긴장감 넘치는 음악, 강력한 엔진의 굉음 속 노면을 가르는 타이어 소리 등으로 역동적 화면을 적절한 음향으로 뒷받침하면서 영화가 자아내는 긴박감은, 보는 이로 하여금 추적의 당사자가 된 것처럼 하는 실재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런 모든 긴장감은 사실 감각적 수준에서만 멈추고 만다. 액션의 과정과 결과가 공감을 얻으려면, 그 과정의 합리성과 그 결과의 개연성에 대한 관객의 동의가 미리 확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시 청각적 긴장감의 유발과는 구별되는 별도의 것이다.

『황해』에는 순간의 집중과 부분의 밀도는 있으되, 연결의 유기성과 전체의 자연스런 균형이 없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행위들간 교차가 고도로 정교한 직조술로 ‘인위적으로 짜여져’ 있고, 치정과 탐욕 및 복수라는 그들 행위들의 주된 동기들은 무척이나 상투적이다.

장면 하나 하나의 사실성과 긴장감은 날것으로 선연한데, 정작 그런 밀도높은 부분들이 봉사하는 전체의 정서 혹은 의미는 상당히 피상적이며 도식적이다.

그래서 『황해』는 전작 『추격자』를 의미 있게 추적하지 못했다.

아니 감각적으로는 추월하였다. 하지만 스크린의 표면을 채우는 그 빛과 소리의 어지러운 어우러짐 속, 내면의 긴장과 몰입을 관객으로부터 당당히 요구하는 한편의 스릴러로서는 한참 뒤처지게 되었다. /투데이안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