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셉션』
『인셉션』: 4중 혹은 5중의 중층 구조의 무의식 속 유희에의 초대
조 현 철 <군산대학교 교양교직과 교수>
‘인셉션’이란 무엇을 어디에 처음 도입한다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이다. 공상과학 영화의 제목으로 차출되었으니, 예사로운 ‘도입’이 아님이 분명할 터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생각의 주입’이고, 그것도 생판 다른 사람의 무의식이 활개치는 그의 꿈속이 그 현장이란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무리한 상상으로부터 자양분을 얻어 헐리웃 영화공장들이 온갖 기괴한 상품을 산출해내 온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타인의 꿈 속에 침투하여 미리 설계된 꿈의 내용을 심어 넣고 다수가 그 개인의 무의식 영역을 함께 공명하며 그 내용을 통제해간다는 설정은 참으로 발칙한 판타지의 극한을 구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도 모라란 듯 음모자들은, 그 개인의 ‘꿈 속의 꿈’들을 중층적으로 전개해가며 그 과정에서 최종의 목표를 일관되게 달성해 나아가게 되는데, 이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이번의 임무는 ‘미션 임파서블’ 그 자체에 해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토록 황당하고 억지스러운 이야기로 관객의 주의를 140분씩이나 붙잡아둘 수 있다고 영화는 선언하고 있는데, 그것은 나름대로 이 영화가 이런 종류의 복잡함을 능란하게 다루어낸 이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름 ‘크리스토퍼 놀란’의 연출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일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메멘토』와 『다크 나이트』를 통해 그 혀를 내두를 정도의 복잡함을 지닌 내러티브를 심리적 긴장과 시각적 다양성으로 전환해내는 재주를 여실히 입증한 ‘놀란’은, 『인셉션』에서도 ‘{[(꿈 속의 꿈) 속의 꿈] 속의 꿈} 속의 꿈’이라는 그 희한한 복잡성을 영리하게 활용하는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고 15분이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관객은 몇 가지의 핵심적이면서도 무리한 가정을 쉽게 간과해 버리면서 어느새 ‘놀란’ 감독이 설계해놓은 무의식의 현실 속에 깊이 참여하게 되는데, 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마치 심리치료 장면에서 최면술사의 암시에 반응하는 내담자의 상태에 빠지는 것과도 같다.
‘말도 않되!’를 되내이던 의심 많던 관객이 기꺼이 감독이 펼치고자 하는 꿈을 따라가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인셉션』의 어떤 부분이 그러한 최면을 그토록 쉽게 발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중층적 꿈 상황’이 허용하는 그 놀라운 유연성이, 감각적 자극화의 무한 경험을 원하는 관객의 기호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표적’이 탄 비행기의 비즈니스 칸 상황 (하늘을 나르는 중) 속에서 꾸는 꿈은, 강 속으로 치닫는 미니버스 안의 상황이고, 그 안의 인물들이 꾸는 꿈은 붉은 조명이 은은하게 번지는 호텔 방에서의 긴장감 넘치는 신문 과정이고, 이 상황 속 인물의 무의식에 기반하여 전개되는 또 다른 꿈은 눈 덮인 설원의 고지대에서 스키 탄 사람들이 벌이는 맹렬한 추격전이며, 다시 또 그 다음 단계의 상황은 주인공의 궁극적인 무의식 상태인 회색의 림보 속에 거대하게 설립되고 또 일부 파괴된 수상의 거대 빌딩군이다.
이 모든 다양성의 전혀 있을법하지 않은 조합이 ‘꿈 속의 꿈’이라는 공식에 의해 우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고, 감각의 홍수 속에 몸을 맡기고자 하는 관객에게 그 유려한 일탈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영화가 이러한 일탈을 부추킴에 있어 시각 디자인의 위력은 가히 압도적인 것이 되었다. 꿈의 설계자들에 의해 프로그램되는 도시는 거리의 건물블록들이 거대한 규모로 180도 회전하며, 하얗게 얼어 붙은 고원지대의 봉우리들은 결국 연쇄적으로 눈사태를 일으키고, 어느새 장면은 시원스런 해변의 잿빛 수상도시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곳은 첨단의 마천루와 거대한 규모의 문명 파괴 그리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 깃든 남루한 옛 주택들로 구성된 독특하고도 모호한 공간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이 모든 공간의 구성과 또 그 역동성은,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독톡한 시각적 상상력을 그 장대한 규모와 정교한 디테일로 구체화시킴으로써 충실히 구사되고 있다.
그런데 『인셉션』의 야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무려 4중의 ‘꿈 속의 꿈’ 구조를 거침없이 밀어붙여 가며 관객에게 지적 복잡성과 감각적 포화의 부담을 안겨 둔 것만으로도 감독은 성이 안 찼던 모양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그 불온한 ‘꿈 속의 꿈’의 게임이 암시되는 순간, 관객은 권태로운 피로를 느끼거나 혹은 반전의 희열 속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너그러운 관객이라면 이런 종류의 지적 유희도 충분히 즐길만 하다고 생각하게 될 터이겠지만, 다만 한 가지 그러한 유희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규모의 상식과 이성적 추리의 반납이 요구되었다는 점도 함께 인식해야 할 것이다./투데이안 객원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