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녀' 감각적! 자극적! 고발적?

2010-06-15     조현철 군산대 교양교직과 교수

[투데이안 톡톡튀는 객원논설위원]

1960년작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우리 영화사의 컬트 걸작이라는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는 작품이다.

당시 중산층의 상징이었던 2층양옥집이라는 폐쇄적 공간 속에서 계급이 다른 이방인으로서의 한 격렬한 여성이 처절한 자기존재의 과시와 철저한 복수를 감행하는 과정을, 숨막히는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정교한 연출로 묘사해낸 이 작품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모범적 스릴러로서 손색이 없었다.

또한 이러한 긴장감은 경제적 지위 향상을 꾀하다 간신히 중산층의 문턱에 진입한 주인공들의 불안감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영화는 당시 산업화사회로 진입함에 따라 우리 의식을 지배해가던 배금주의에 기초한 속물 근성이 전통적인 배타적 가족주의와 단단히 결합되어 가던 사회적 현상을 언급하는 사회고발적 의미도 함께 갖추게 되었었다.

50년이 지난 지금 이 걸작을 다시 매만지게 된 2010년판 『하녀』의 제작진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오랜 기다림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 2010년의 『하녀』는 뜻밖에도 ‘리메이크’가 아닌 ‘관련작’이 되도록 의도되어진 것이었다. 『하녀』는 스릴러이기도 사회문제작이기도 스스로 포기한, 윌메이드의 공산품이 된 것이다.

『하녀』는 먼저 감각적이다. 이 하녀가 둘씩이나 고용되어 있는 3인 가족의 거주지는 최상의 부를 향유하는 특권층이다.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대저택 속에 정교하고도 세련되게 치장된 인테리어, 영양과 포만의 수준을 초월한 듯 데커러티브한 음식들, 유려하게 연주되는 베토벤의 템페스트, 평상시 가족들의 절제된 메너 등 집안을 채우는 갖가지 유무형의 요소들은 각자가 그 자체로서 시 청각적인 미장센으로 작동한다.

그에 따라 지켜보는 이의 감각적인 관음의 욕구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면서 고품격의 물리적 삶의 수준에 대한 완벽한 판타지를 제공한다. 이 아름다운 피사체들에 대해 카메라와 조명은 때로는 시원스럽게 때로는 미끄러지듯이 또한 어떤 때는 은은하게 또 다른 때는 격렬하게 접근하면서 영화는 전체적으로 매우 스타일리쉬한 톤을 유지하게 되었다.

『하녀』는 또한 자극적이다. 자극적인 대사와 장면으로 무장한 영화는 상당히 불온한 매력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첫 시퀀스의 번잡한 시장 골목 속 투신 자살 대목은 이 영화가 시종 유지하게 되는 톡 쏘는 듯한 충격 제시의 톤에 대한 일종의 예고편처럼 보인다.

적당히 짧은 스커트가 감질나게 부각시키는 여주인공의 다리 선이 주인 남자의 시선을 수렴시키는 과정에서, 그리고 말 한마디 없이 포도주 잔으로 상대에게 거래를 청한 뒤 여주인공의 품에 잘 단련된 상채를 올누드 상태로 맡기는 주인남자의 행각을 전하는 대목에서, 영화는 대단한 에로틱 유인력을 발휘한다.

이어지는 두 사람간 섹스 장면에서는 사실적인 성행동단위별 언급을 불사한 채 대사가 내뱉어지고 있어, 그 성행위의 시각적 노출의 양과 강도와는 별도로 강력한 충격을 준다. 물론 이러한 고밀도의 자극성은 이 영화의 에로티시즘의 구현에만 봉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상술한 장면들은 모두 스토리 전개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소흘함이 없다.

첫 장면의 충격은 영화의 엔딩을 예고하는 효과를 발하고 있으며, 두 사람간 애정 행각이 발전해가는 과정에서의 에로틱 설정의 배치는 자연스러운 일이며, 섹스 중 남자에 의해 주도되는 노골적인 성행동 관련 기능적 대화는 주인 남자의 그 행위에 대한 한시적이고 쾌락주의적인 태도를 잘 설명해준다.

이처럼 플롯의 내용과 유기적 통합을 유지하는 자극적 대사와 표현은, 영화가 종결에 이르게 됨에 따라 더욱 그 강도를 더해간다.

그리하여 여주인공이 자신의 유산을 깨닽게 되는 과정은 그녀가 남자와 정사를 벌이던 욕조 속에서 혼자 목격하는 붉은 핏물 장면으로 묘사되고, 강제 유산을 추궁하는 남자는 오만한 자세로 장모에게 도발적인 대사를 찍어 내린다.

“이봐요, 당신 딸이 난 자식만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는거에요?”

이러한 영화의 자극적인 스타일은 급기야 우리의 여주인공이 장렬한 자기파멸적 복수를 감행하는 엔딩에서 최고조에 달하는데, 공간적 역동성과 불꽃놀이류의 시각적 충격이 결합되면서 극단의 자극성이 구사되고야 만다.

『하녀』가 가진 고강도의 스타일은 무엇을 전하기 위한 것일까? 물론 영화는 이러한 형식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모든 것을 갖춘 남편을 비굴하게 섬기고자 하는 속물적 모녀는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려 하고, 남의 뱃속에 있는 생명을 과실로 발생한 불순물쯤으로 처리해보려 한다. 세상의 도덕과 제한을 초월한 부르조와 남자는 끝을 모르는 오만과 이기심으로 무장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 멍청한 듯 순수한 우리의 여주인공과 그녀를 통해 뼈 속까지 깃든 하녀 근성에서 일탈을 감행하는 늙은 하녀가 대비를 이루면서, 영화는 우리시대 사람들의 ‘하녀정신으로 대표될 수 있는 속물근성을 지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녀』가 전할 수 있는 이러한 메시지는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속물근성과 이기심의 주체는 우리사회에서도 매우 예외적인 특권층의 인물로 한정되고 있어서 일반인의 자화상의 일부로 그런 속성을 투입시키기에는 많은 부족함이 남는다.

그리하여 『하녀』의 블랙코메디적 유머는 특권층의 이중성과 본질에 대한 가벼운 풍자의 성격을 가지는 것에 머무르고 만다.

결국 극장문을 나서면서 관객의 뇌리에 남는 것은 그 고급스런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미련일터인데, 그만큼 이 영화의 감각적 미려함은 대단한 것이 되고 말았다. 조 현 철 <군산대학교 교양교직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