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의 소설 ‘숨은꽃’(1992년 이상문학상 대상)의 무대이기도 한 귀신사는 소설 속에서 귀신사를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라고 표현하고 있다.

 

계단을 올라서면 수평적이라는 느낌보다는 수직적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드는 지혜의 빛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한 대적광전이 바로 보인다.

귀신사는 신라 문무왕16년 의상대사가 신라 왕실의 지원을 받아 세운 화엄십찰 (삼국을 통일 한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의 접경지역에 사상적 통일을 위해, 또는 정치적인 이유로 세운 절) 중의 하나로 백제속에 세워진 신라계 절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백제 왕실의 내원사찰(자복사찰: 백제왕실의 복을 비는 절)로 처음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그 이유로는 대적광전 뒤편에 놓여있는 석수와 남근석을 근거로 하고 있다. 절 안에 남근석을 설치하는 것은 백제 왕실의 자복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남근석이 자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설이 있는데 이곳이 풍수지리상 구순혈에 해당되기 때문에 음기를 누르기 위해서 세웠다는 설도 있다.

남근석이 사찰 경내에 들어오게 된 것은 아마 이 석수가 세워질 무렵 불교의 세가 미약할 때 일거라 여겨진다.

어떤 이유에건 다산과 풍요의 상징인 남근석이 사찰 경내에 세워졌다는 것은 아주 의례적인 일로 불교가 토속의 민간 신앙과 자연스럽게 습합되는 과정으로 보인다.

창건 당시의 절이름은 국신사(國信寺)였으며 구순사(狗脣寺), 귀신사(歸信寺)등으로 절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각각의 이름이 어느 시기에 바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귀신사는 금산사의 위세에 눌리고 지금은 작은 절처럼 보이지만, 임진왜란때 승병의 양성지이기도 했고 한때는 금산사가 말사이기도 한 때가 있었다.

절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것은 귀신사를 들어오기 전에 논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귀신사 부도와 귀신사에서 서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 청도리 3층석탑이 있다.

한때 8개의 암자를 거느렸다고 하니 청도리 3층석탑은 귀신사에 딸린 암자에서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귀신사는 17c경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대적광전과 대적광전 안의 소조삼불좌상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명부전불상, 영산전불상, 귀신사부도, 석수, 귀신사석탑 등이 유형문화재로 지정됐고, 청도리3층석탑이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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